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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鄭夢周)

정몽주(동방이학종조) 사진

정몽주(동방이학종조)

정몽주(鄭夢周·1337~1392)는 자(字)가 달가(達可)이고 호는 포은(圃隱)이며, 경주부 오천현인(烏川縣人)으로 지주사(知奏事) 정습명(鄭
襲明)의 후손이다. 타고난 자질이 호탕하고 고매하여 충효의 큰 절개가 있었으며, 젊어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성리(性理)를 궁구하여
깊이 얻은 바가 있었다.

공민왕 6년(1356년), 진사과에 합격하고, 이어 동당감시(東堂監試)에서 장원하였다. 관직에 나가 한림(翰林)이 되었으며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 전농시승(典農寺丞)에 이르렀다. 당시에 상례(喪禮)의 예법이 없어 사대부조차 모두 백일이면 탈복(脫服)하였으나 선생은 두 분 부모
의 상에 모두 여막(廬幕)을 짓고 3년간 시묘(侍墓)하니 그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공민왕이 성균관을 새롭게 하여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아 덕행(德行)과 경술(經術)이 있는 선비를 뽑아 학직(學職)을 채웠는데, 이
때 선생이 수석으로 뽑혀 예조정랑(禮朝正郞)과 성균박사(成均博士)를 겸하여
경전을 가르치고 논란(論難)하면서 피곤을 이겨냈다. 일찍이 경서(經書)로써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주자집주(朱子集註)』뿐이었는데, 선생이 강설(講
說) 하는 것이 빼어나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자 듣는 사람들이 퍽 의심하였으
나 운봉(雲峰)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을 얻어 보니 합치하지 않
는 바가 없었다. 이색이 매우 칭송하여 ‘달가(達可·정몽주)는 이치를 논함에 횡
(橫)으로 말하고 수(竪)로도 말하는데 이치에 맞지 않음이 없구나’ 하며 동방
이학 (東方理學)의 조(祖)라고 추대하였다.

공양왕 2년에 찬성(贊成) 겸 지경연사(知經筵事)가 되었고, 얼마 후에 문하시
중(門下侍中)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에 제수되고 익양군 충의백(益陽郡
忠義伯)에 봉해졌다. 선생은 백관의 어른이 되어 큰일을 처리하고 큰 의문을
결단하면서도 음성이나 얼굴빛이 동요되지 않았다. 사대부나 서민들이 『주
자가례(朱子家禮)』를 본받아 사당을 세우고 신주(神主)를 만들어 선조의 제
사를 받들게 하고, 상례와 제례에 불교의식을 금하도록 청하였다.

공양왕 4년(1392년) 4월에 이성계가 병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문명하고 돌아
오다 선죽교(善竹橋)에 이르러 죽임을 당하니 향년 56세였다. 조선 태종이 그
충절을 표창하여 문충(文忠)의 시호를 내렸으며, 중종 때에 문묘(文廟)에 배향
되었고,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에서 향사하고 있다.

정몽주 초상화(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사진

정몽주 초상화(국립중앙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