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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애왕과 김우징의 달구벌 전투

신라 왕위찬탈의 각축장 달구벌(達句伐)

836년 흥덕왕이 재위 11년에 붕어하자 흥덕왕의 사촌 동생 상대등 김균정(金均貞)과 사촌 동생 이찬 김헌정(金憲貞)의 아들 김제륭 (金悌
隆)이 왕위를 다투었다. 집사시중 대아찬 김명(金明)과 아찬 김이홍(金利弘), 배훤선(裵萱仙) 등은 김제륭(金悌隆)을, 대아찬 집사성 시중
김우징(金祐徵)은 김예징(金禮徵)과 김양(金陽)으로 더불어 아버지 김균정(金均貞)을 옹립하고자 했다. 양군(兩軍)이 궁성에서 벌인 치열
한 왕위 계승전에서 김균정(金均貞)이 살해되어 패배하자 김양(金陽)은 다리에 화살을 맞은 채로 김우징(金祐徵)과 함께 도망쳤다. 왕위
계승전에서 승리한 김제륭(金悌隆)이 즉위하니 바로 희강왕(僖康王)이다. 희강왕이 즉위하자 시중 김명(金明)이 상대등이 되고 아찬
김이홍(金利弘)이 시중이 되었다.

김우징(金祐徵)이 원한을 품고 가족과 함께 황산진구(黃山津口)로 가서 청해진(淸海鎭) 대사(大使) 궁복(弓福), 즉 장보고에게 망명하자
김균정의 매서(妹胥) 아찬 김예징(金禮徵)과 아찬 김정순(金貞順) 등도 청해진에 같이 합류하였다. 희강왕 3년(838년)에 상대등 김명(金明
)과 시중 김이홍(金利弘) 등이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의 측근을 살해하고 위협하니 왕은 자신이 온전치 못할 것을 알고 궁중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이에 김명(金明)이 즉위하니 곧 민애왕(閔哀王)이다. 김양(金陽)은 군대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들어가 김우징(金祐徵)과 합류
했다. 김우징은 김명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청해진 대사 장보고(弓福)에게 청하여 5,000명의 정병(精兵)을 지원받아, 그해
12월에 김양(金陽)을 사령관인 평동장군(平東將軍)으로 삼아 막하에 염장(閻長)·장변(張弁)·정년(鄭年)·낙금(駱金)·장건영(張建榮)·이순행
(李順行) 등 6명의 장군과 함께 신라 수도 경주(慶州)로 진군했다. 무주(武州) 철야현(鐵冶縣·지금의 羅州 南平)에서 민애왕이 파견한 대감
김민주(金敏周)가 지휘하는 국왕군과 접전하자 김양(金陽)은 낙금(駱金)·이순행(李順行)으로 하여금 기병(騎兵) 3,000명으로 돌격을 감행
하여 국왕군를 거의 다 섬멸하였다.

민애왕 2년(839년) 윤 정월 19일에 김양(金陽)의 대군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달구벌(達句伐ㆍ大邱)에 당도했다. 민애왕이 김양의 병사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찬 대흔(大昕), 대아찬 윤린(允璘), 억훈(嶷勛) 등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막도록 하였으나 김양의 군사가
크게 이기니, 민애왕의 군사 중에 죽은 자가 반이 넘었다. 이때 민애왕은 서쪽 교외의 큰 나무 아래에 있었는데, 측근들이 모두 흩어지자
홀로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경주 월유택(月遊宅)으로 도망쳤으나 김우징에게 죽임을 당했고, 시중 김이홍(金利弘)은 산림(山林)으로
도망하다 김양(金陽)의 기병대에 잡혀 죽었다. 이에 김우징(金祐徵)이 즉위하니 신무왕(神武王)이다. 신무왕은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손자 김균정의 아들이며, 희강왕(僖康王)의 사촌 동생이다.

왕위쟁탈전은 신문왕에 이어 문성왕(文聖王)의 즉위로 안정되었고, 문성왕의 유언에 따라 즉위한 헌안왕(憲安王)은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어 유언에 의해 사위 김응렴(金膺廉)이 즉위하니 경문왕(景文王)이다. 왕위계승의 정통성이 부족했던 경문왕은 분열된 왕실을 통합하기
위하여 경문왕 3년(863년)에 민애왕의 명복을 비는 동수원당(桐藪願堂)을 조성하니 지금의 동화사 비로암에 있는 민애대왕삼층석탑과
석조비로자나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