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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과 견훤의 동수대전(桐藪大戰)

고려 태조 10년(927년), 왕건이 친히 고려·신라 동맹군을 이끌고 용주(龍州·예천 용궁)와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문경)을 점령하여 죽령
(竹嶺)과 함께 계립령(雞立嶺·鳥嶺)의 요충지를 확보하자, 후백제의 견훤은 소수의 별동대로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이 있는 북방지역을
공격하는 한편, 자신은 동남쪽으로 진격하여 고울부(高鬱府·永川)을 짓밟고 동경(경주)으로 다가갔다.

견훤이 신라의 경주를 공격한 것은 경애왕(景哀王)의 친 고려 정책과 고려와 신라의 군사동맹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고, 남방의 신라를
제압하여 친 고려 왕권을 친 백제 왕권으로 교체할 목적이었다. 경애왕이 사신을 급파하여 구원을 요청하자, 왕건은 강공훤(康公萱)·손행
(孫幸)ㆍ련주(聯珠) 등에게 정예 10,000명의 대군을 보내 신라를 구원케 했으나, 견훤은 이보다 앞서 동경(경주)을 공격했다. 이때 경애왕
은 남산 포석정(鮑石亭)에 있다가 후백제군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남(城南)의 이궁(離宮)에 숨었으나 잡혀와서 처형당했다. 견훤은
경애왕의 표제(表弟ㆍ외종사촌동생) 김부(金傅)를 왕으로 옹립하고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 등을 인질로 하고 신라의
진보(珍寶)·병장(兵仗)·백공(百工)·자녀(子女)들을 노획, 철군했다.

후백제군은 개선 길에 공산 동쪽 은해사 일대에서 고려의 5,000의 기병과 접전하였다. 오랜 행군으로 피로에 지친 고려군이 패퇴하자,
왕건은 태조지(太祖旨)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물러나 공산의 남쪽 동수(桐藪) 일대에서 후백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형세가 불리
하여 견훤의 군사가 왕건을 포위하여 매우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대장(大將)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은 포위망을 풀기 위해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고 고려군은 패배하였으나 왕건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 승세를 탄 견훤은 대목군(大木郡·칠곡 약목)을 함락하고,
들판에 쌓아놓은 노적가리를 다 불태웠다.

공산동수(公山桐藪)전투는 930년의 고창(古昌·지금의 안동)전투와 934년의 운주(運州·지금의 충청남도 홍성)전투와 더불어 후삼국의
향방을 결정한 전투로 유명하다. 왕건이 공산동수(公山桐藪)에서 비록 견훤에게 대패하였으나 이 전투로 인해 신라의 민심을 얻어, 훗날
경순왕의 귀부(歸附)로 삼국을 통일하는 계기가 되었다.

팔공산과 대구 일원에는 왕건과 관련하여 파군치(破軍峙ㆍ파군재), 전탄(箭灘·살내), 일인석(一人石), 왕산(王山), 안심(安心), 반야월(半
夜月), 실왕리(失王里), 은적사(隱跡寺), 안일사(安逸寺), 왕굴(王窟), 장군수(將軍水), 임휴사(臨休寺), 지묘사(智妙寺), 대왕재(大王峴),
독좌암(獨坐巖), 초례봉 등의 지명과 숱한 설화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