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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사 초조대장경 소실(燒失)

초조대장경 판각

불경(佛經)은 처음에 팔리어로 패다라(나뭇잎)에 기록했으며, 이를 패엽경(貝葉經)이라 한다. 본격적으로 불경이 목판에 새겨진 것은
송나라 개보판대장경(開寶板大藏經·971~983)이다. 이를 토대로 고려 현종 대에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1011~1029) 판각을 시작했다.

1237년, 이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초조대장경은 현종 2년(1011년)에 침략한 거란(契丹)을 물리치기
위해 판각했다’는 기록과 같이 불력의 힘을 빌려 국난극복을 위한 호국의 발원이었다. 초조대장경은 고려인의 자주정신과 높은 문화수준,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리경을 계승한 발달된 인쇄기술이 집약된 고려 최고의 보물로 개경의 현화사와
흥왕사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초조대장경 부인사 이운(移運)

개경에 봉안했던 초조대장경이 언제, 어떤 이유로 부인사로 옮겼는지에 대한 문헌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인종 4년(1126년)에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의 궁궐이 전소되었고 인종 13년(1135년)에 묘청의 난으로 국내정세가 혼란한 가운데 금(金)의 압력이 가중되는 등 내우외환
(內憂外患)에 봉착하자 개경의 현화사와 흥왕사에 보관했던 초조대장경을 공산 부인사로 옮겨 고려 최고의 보물을 안전하게 보관하고자
했다. 재조대장경이 한강과 낙동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합천 해인사로 옮겼던 예와 같이, 초조대장경도 개경에서 예성강과 한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단양을 거쳐 안동에서 낙동강과 금호강을 따라 해안현(지금의 불로동 일대)으로 옮긴 뒤에 육로로 부인사로 이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초조대장경 소실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1237년에 재조대장경을 발원하며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부인사에 소장된 대장경(大藏經) 판본
도 또한 남김없이 불탔습니다. 아! 여러 해를 걸려서 이룬 공적이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 나라의 큰 보물이 상실되었다’는 기록과 『고려사
고종 38년(1251년)』에, 왕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재조대장경 완공을 고하는 분향례에 ‘현종 때의 대장경 판본은 임진년(1232년)에
몽골의 침입 때 불타버렸다’는 기록과 같이 고종 19년(1232년)에 부인사가 소장하고 있던 초조대장경은 몽골군의 방화로 한 줌의 재가
되었다. 고려에 침입한 몽골의 살리타이가 고려 조정에 항복을 종용하자 최우(崔瑀)는 고종 19년(1232년) 6월에 왕을 협박하여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고 항전하였다. 몽골의 주력부대는 소백산맥을 넘지 않았지만, 고려인들의 항전의지를 꺾고 고려조정에 대해 출륙 항복을
압박하고 자 별동대를 보내 국지대보(國之大寶)로 고려인의 문화적 자부심이자 대몽항전의 구심점이었던 부인사의 초조대장경을 불태웠
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초조대장경은 국내에서 127종 332권 332책이며, 일본 남선사(南禪寺)에는 521종 1,823권, 1,712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고, 이외에도 일본의 대마역사민속자료관, 안국사에도 다수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