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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대장경 낙성법회

재조대장경 판각 동기

고종 19년(1232년)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하여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자, 몽골은 별동대를 보내 팔공산 부인사(符仁寺)에 봉안했던
초조대장경을 불태워 고려의 저항의지를 꺾고자 했다. 고종 24년(1237년),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吿文)』에 ‘제불성현
삼십삼천(諸佛聖賢三十三天)은 신통한 힘을 빌려주어 완악한 오랑캐로 하여금 멀리 도망하여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게 하여
전쟁이 그치고 중외가 편안하기를 발원’한 바와 같이 호국의 염원에서 재조대장경을 각판하였다.

대장경의 판각

강화도에 천도한 무신정권의 최이(崔怡·옛 이름 瑀)는 사재(私財)를 내어 대장경판(大藏經版) 재조(再雕)를 추진했다. 강화도에 『대장도
감』을 설치하고 고종 24년(1237년)부터 동왕 29년(1242년)까지 6년 동안 45,675판을 판각했으나, 제반 사정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매부 최이(崔怡)의 강권을 받은 정안(鄭晏)은 사재(私財)로 남해현(南海縣)에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를 설치하고,
고종 28년(1241년) 말엽부터 고종 35년(1248년)까지 대장경을 판각했다. 6년 동안 『남해분사대장도감』에서는 강화도 『본사대장도
감』에서 새긴 45,675판의 배가 넘는 108,621판을 새겼다. 고종 21년(1234년)에 시작한 재조대장경 판각은 16년이 지난 고종 38년
(1251년)에 완성을 보았다.

대장경의 낙성법회

『고려사』 고종 38년(1251년) 9월 25일에 ‘왕이 강화도성 서문(西門) 밖의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에 행차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분향[行
香]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사』 충렬왕 15년(1289년) 윤 10월 9일에 ‘왕이 금자원(金字院)에 행차하여 대장경(大藏經)의 완성을
경축하였다’는 기록에서 재조대장경이 완성된 지 38년이 지나서야 국가차원에서 경축행사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이보다 20여 년 앞서
‘원종(元宗) 9년(1268년) 여름에 조지(朝旨)를 받들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명덕(名德) 100원(員)을 모아 대장경(大藏經) 완성을
기념하는 대장낙성법회(大藏落成法會)을 운해사(雲海寺)에서 개설했다’는 기록이 『보각국사비(普覺國師碑)』에 실려 있다. 부인사는
초조대장경과 함께 소실되어 우왕 8년(1382년)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眞覺國師大閣圓照塔碑)』의 기록과 같이 고려 말에 이르러 중창
된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는 사세를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운해사(雲海寺)는 지금의 은해사를 말한다. 당시 운해사는 선교(禪敎) 명덕(明德) 100명이 모여 재조대장경 낙성법회를 개최할 정도로
팔공산에서 사세가 컸다. 일찍이 팔공산은 부인사의 초조대장경 소장과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를 통해 고려불교의 중심지였다.
강화도에 재조대장경 판당(板堂)이 있었음에도 팔공산에서 대장경낙성법회를 개최한 것은 몽골전란 이후에도 팔공산이 여전히 고려불교
중심지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