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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의 피난처 공산성(公山城)

중성성벽 사진

중성성벽

몽골은 1231년부터 1259년까지 29년 동안 모두 7차에 걸쳐 고려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줬다. 고종 41년(1254년) 7월, 차라대(車羅
大)가 지휘하는 몽골군은 고려를 침공하여 개경-양평-여주-안성-음성-충주에 이르는 내륙종단 노선을 따라 남진하여 9월 중순, 충주산
성을 공격했으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이에 경상도로 내려가 10월에 상주산성에서 황령사(黃嶺寺) 승려 홍지(洪之)의 공격에 크게
패했음에도 대구를 거쳐 계속 남진하여 12월 초에는 산청을 거쳐 진주 부근까지 진출했다.

『고려사』 고종 42년(1255년) 3월, ‘당시 공산성(公山城)에 함께 들어가 있던 군현(郡縣)의 백성들 중 양식이 떨어진 먼 곳에서 온 자들
가운데는 굶어죽는 사람이 매우 많아서 노약자들의 〈시신이〉 골짜기를 메웠으며 심지어는 아이를 나무에 묶어두고 가는 자도 있었다’는
기록에서 차라대(車羅大)의 몽골군이 대구를 공격하자 팔공산 주변의 백성들이 공산성(公山城)에 들어가 피난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우왕 8년(1382년)에 ‘왜구가 경산(慶山)·대구(大丘)·화원(花園)·계림(雞林) 등지를 침략하였다’는 기사와 우왕 9년(1383년)에
‘왜구가 경상도(慶尙道) 영주(永州ㆍ永川)·신녕(新寧)·의흥(義興)·의성(義城)·선주(善州ㆍ善山) 등지를 노략질하였다’는 기사로 보건대,
많은 백성들이 공산성에 입성하여 왜구의 화를 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사원의 『낙재일기(樂齋日記)』 1592년 4월 24일에 ‘4월 21일, 왜적이 대구로 진입하여 대구성(大丘城)을 점령하자 대구부사 윤현
(尹晛)은 동화사로 피했다’고 하였고, 또 6월 14일에, ‘공산성의 동쪽을 순회하니 피난한 사람들이 엮은 초막草幕이 매우 많았다’고 하였
고, 서재겸(徐再謙)의 『용사일기(龍蛇日記) 1592년 5월 19일에 ‘소문에 들으니 향인들이 모두 모여 팔공산성으로 떠났다’고 기록한 일기
처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을 피해 대구부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팔공산과 공산성으로 피란했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6년(1593년) 11월 7일에 ‘좌도(左道)의 팔공산은 바로 대구와 청도(淸道)가 마주치는 곳으로 지형이 더없이 험하
기 때문에 지난해 왜적이 산 밑에 가득하였으나 이들은 절정에 있는 많은 피난민을 보기만 하고 끝내 올라가지 못해 많은 백성들이 온전히
살았다’고 한 바와 같이 공산성은 백성들의 피난처이자 방어(防禦)의 요충지(要衝地)로 높이 평가했다.

2017년 9월 16일 실시한 공산성 지표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 토기조각과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기와조각이 수습되어 공산성이 통일신라
시대에 축성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공산성(公山城)은 신라 삼한일통의 전진기지였고, 고려와 조선시대에 외적(外敵)이 침략할 때
마다 팔공산 주변에 사는 백성들의 피난처이자 방어(防禦)의 요충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