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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한티순교성지

피정의 집 사진

피정의 집

팔공산 주 능선에서 군위 부계와 칠곡 동명을 잇는 한티재의 원래 위치는 동쪽으로 500m 남짓 떨어진 한티골(大谷) 위에 있었다. 순조
15년(1815년)에 일어난 을해박해(乙亥迫害)로 칠곡 지천의 신나무골과 청송, 진보, 영양 등지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대구에 있는 경상감
영으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히자, 옥바라지를 위해 가족들이 이곳으로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천주교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한티골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600m 이상 되는 고지대이나 대구와 칠곡 읍내가 그리 멀지 않아 생계를 위해 화전(火田)을 일구고
옹기나 사기, 그리고 숯을 구워 팔기에도 편리한 곳이었다. 1860년 경신박해(庚申迫害)가 일어나자 신나무골로 피난했던 칠곡 사람 배손
은 집안 식구와 함께 한티로 피해 사기굴에 숨었다가 뒤쫓아 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부인 이선이(엘레사벳)과 장남(배스테파노)이 신앙을
고백하다 모자가 함께 순교했다.

경신박해로 흩어졌던 신자들이 탄압이 잦아들자 다시 한티로 모여 이전보다 더 큰 마을이 되었다. 1862년 베르뇌 주교의 성무집행보고서
에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 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서 40명가량이 성사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확인된다. 이곳은
높고 외진 곳이라 사람살기에는 적당치 않았다. 깊은 산중이라 겨울에는 추위가 심하고 여름에는 일조량 부족으로 제대로 농사를 짓기 힘
들 뿐 아니라 산짐승들의 피해도 컸다. 주로 옹기와 사기그릇, 그리고 숯을 구워 대구나 칠곡 등지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었다. 지금도 골
짜기 안쪽에는 사기와 숯을 굽던 가마터가 남아있다.

1866년 흥선대원군이 내린 천주교 금압령에 의한 병인박해(丙寅迫害)로 7년 동안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하여 남종삼ㆍ정의배 등 한국
인 천주교도 8천여 명이 죽임을 당하였다. 1868년 늦은 봄에 서울 포졸과 칠곡도호부 포졸이 합세하여 이곳 한티를 습격했다. ‘먼저 베고
뒤에 보고하라’는 선참후계령(先斬後啓令)에 따라 현장에서 배교를 거부한 37명 이상의 신자들이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마을에 불을 질러
생활터전은 잿더미가 되었다. 포졸들이 물러가자 흩어졌던 신자들이 다시 모여 한티골짜기 여기저기에서 순교자를 찾아 그 자리에서 묻었
다고 전한다.

한티순교성지에는 37기의 순교자의 묘가 사방으로 흩어져 있다. 살아남은 신자들이 아래쪽에 새로 마을을 만들고 병인박해(1866~1873)
가 끝나고 1886년 한불수호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될 때까지 숨어 살았던 곳이 백 년을 넘게 이어져 온 지금의 한티마을이다. 현재
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한티순교성지』가 조성되어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또한, 옛 한티공소를 비롯한
당시 신자들이 살았던 초가집을 복원하였다. 자신의 신앙을 위해 이곳으로 피신했던 순교자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던 한티마을은 이
제 천주교의 성지를 넘어 경쟁과 갈등에 지친 현대인들의 힐링 공간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팔공산은 찾아오는 이는 누구를 막론하고 받아들였다. 몽골군과 왜구에게 쫓긴 백성을 보호했고, 임진왜란을 당해 피난한 백성들을 숨겼
고,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 신자들을 말없이 품 안에 들였다. 순교자들이 한티에서 흘린 피와 그들의 아픔과 고난은 팔공산에 새겨진
또 하나의 역사이다.

한티공소(복원) 사진

한티공소(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