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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방어선의 교두보 팔공산

다부동전 기념관 사진

다부동전 기념관

낙동강 방어선

낙동강 방어선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의 지형에 의지해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적의 남진
을 저지하고 북진의 교두보를 확보하여 대한민국을 지켜냈던 한반도 최후의 보루였다. 한미연합군은 7월 말까지 ‘미국본토에서 증원군이
한반도에 전개할 시간 확보’를 위해 지연작전을 수행하면서, 북한군의 남진을 막고 유엔군의 반격 발판이 될 교두보 확보를 위해 낙동강을
연결한 지역을 최후 방어선으로 결정했다. 낙동강 방어선은 동서로 90㎞, 남북으로 150㎞, 총 240㎞에 달하며 국군이 128㎞, 미군이 112
㎞를 각각 담당하였다.

다부동 전투

대구는 육군본부와 미 제8군사령부가 자리할 만큼 낙동강 방어선의 중심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북한군의 작전목표였다. 북한군이 전차로 증강된 5개
사단을 투입해서 대구를 목표로 대대적인 공세를 벌이자 한미연합군(국군 제
1사단, 미 제1기병사단)은 대구 사수를 위해 왜관-다부동-팔공산 지역에서 45
일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다부동은 대구의 관문으로 동쪽은 가산산성과 팔공산 주 능선이 하양까지 이
어지고, 서쪽은 유학산과 수암산에 이르는 요충지였다. 임시 수도 대구에서
20㎞ 북방에 있는 다부동이 돌파당할 경우 대구가 풍전등화에 처할 수도 있었
다. 국군 제1사단은 낙동강 방어선 최대격전지로 알려진 328고지, 유학산, 수
암산 전투에서 빼앗긴 고지를 공격해서 탈환하고 진지를 구축해 적의 파상공
격을 막아냄으로써 다부동을 공략해서 대구-부산에 진출하려는 북한군의 기
도를 무산시켰다.

다부동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대공세를 좌절시킨
베르됭(Verdun)전투와 비견된다.

제11연대와 미군의 다부동 전투(1950. 8.14~30)[자료]6.25전쟁사.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 자료 이미지

제11연대와 미군의 다부동 전투(1950. 8.14~30)
[자료]6.25전쟁사.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

가산-팔공산 전투

국군 제1사단의 완강한 방어에 기세가 꺾인 북한군은 8월 16일 오후에, 741고지를 거쳐 가산산성으로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을 은밀하게
침투하여 후방 교란을 시도했다. 8월 18일 동명에 주둔한 제11연대 본부와 미군 포병부대를 습격하면서 시작된 가산산성 전투는 8월 27
일까지 이어졌다. 8월 24일, 국군 제10연대는 미 제23연대의 포병지원 하에 570고지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가산산성으로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여 그 일부를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8월 25일 국군 제10연대 제1대대는 가산산성의 적을 격파하고 741고지의 동북쪽으로
진출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다부동지역을 미 제1기병사단에게 인계하고 신녕에서 작전 중인 국군 제6사단의 좌측에 위치한 팔공산-가산지역에 대한
방어를 담당했다. 9월 9일, 야간에 북한군 제1사단은 ‘9월 11일 안으로 대구를 점령하라’는 군단의 독전명령이 내려오자 1,200여 명의
병력을 증원받아 도덕산에서 동촌비행장으로 진출을 기도했다. 그러나 국군 제15연대와 제11연대가 9월 10일 미명(未明)에 도덕산을
탈취하여 적의 기도를 분쇄하고, 가산산성 일대를 탈환한 데 이어 다부동 지역에서 미 제1기병사단과 협조하여 9월 22일, 북진의 돌파구
를 만들었다.

북한군 9월 공세 시 피아 배치상황(1950. 8. 31.)[자료]6.25전쟁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 이미지

북한군 9월 공세 시 피아 배치상황(1950. 8. 31.)
[자료]6.25전쟁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멀리 가산산성 전경 사진

멀리 가산산성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