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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교주화쟁국사(海東敎主和諍國師) 원효(元曉)

해동교주화쟁국사(海東敎主和諍國師) 원효(元曉) 사진

해동교주화쟁국사(海東敎主和諍國師) 원효(元曉)

탄생과 수학(受學)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성(姓)은 설 씨(薛氏)다. 진평왕 39년(617년) 압독(押督
[梁]郡ㆍ지금 慶山) 불지촌(佛地村) 밤실(栗谷) 밤나무 아래에서 탄생했다.
그래서 이 밤나무를 사라수(沙羅樹)라 불렀다. 650년에 의상(義湘)과 함께 육로
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으나 고구려 순찰대에 붙잡혀 실패하였다. 661년 의상
과 다시 유학길을 떠나 당항성에서 한 고총(古塚)과 기와굴에서 잠을 자다가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을 크게 깨닫고’ 되돌아왔다.

원효의 오도처 공산(公山)

원효의 수도처는 고향의 명산(名山) 공산(公山)이었다. 원효는 이 영산성악(靈
山聖岳)을 전전하면서 명소에서 수도했다. 그의 근본도량은 원효방(元曉 房·현
元曉庵)이었다. 그 외에 중암암(中巖庵) 석굴(石崛), 수도암(修道庵), 서당굴(誓
幢崛) 등이었다. 원효의 수도처 중 견성오도한 제일의 성지는 천고(千古)의 신
비에 숨어있던 서당굴이다. 석굴은 오도봉(悟道峰·세칭 靑雲臺) 정상 가까이 10
50m 높이의 절벽에 있다. 입구에 오른 쪽에 ‘서당굴(誓幢崛)’이란 글자가 오랜
세월 풍마우세(風磨雨洗)로 겨우 판독(判讀)했다. 그 아래에 오도암(悟道庵)이 있다.

금강삼매경약소(金剛三昧經略疏) 찬술

신라에 초전(初傳)된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강설법회에 대안대사(大安大師)의 추천으로 강설하라는 문무왕의 명을 받은 원효는
소에 올라타 소 두 뿔 사이에 책상과 벼루를 걸어놓고 『금강삼매경론소(金剛三昧經疏)』를 완성했으나 누가 훔쳐갔다.
원효는 이 사실을 왕께 아뢰고 사흘을 연기 받아 『금강삼매경약소(金剛三昧經略疏)』을 완성했다.

원효와 요석공주

원효는 자기를 이을 사자(嗣子)를 얻고 싶어 ‘누가 나에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겠노라.’하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문무왕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왕사(王使)를 보내 원효를 찾아오게 했다. 마침 원효가 남산(南山) 삼화술(三花述(山))에서 내려와
요석궁(瑤石宮) 앞의 문천(蚊川) 유교(楡橋)에서 만나자 왕사가 일부러 개울에 빠뜨려 옷을 젖게 한 뒤에 요석궁으로 원효를 모시고 갔다.
요석궁에서 며칠을 묵게 되니 둘은 깊은 사랑에 빠져 아들 설총(薛聰)을 낳으니 원효의 지극한 사랑과 유교(儒敎)로 교육하여 아비와
쌍벽을 이루는 천재로 자라나 신라 10현(賢)의 한사람인 최고의 유학자로 대성했다.

고금유일의 대사상가

원효는 화엄경의 원융사상(圓融思想)과 법화경의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으로 신라 중대 전제정치와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이 이론으로 신라민중을 교화단결(敎化團結), 거국총화(擧國總和)시켜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공헌했다.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대신기신론종요(大乘起信論宗要)』, 『화엄경종요(華嚴經宗要)』,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등은 당(唐)과 일본 불교계의 감복과 존경을 받았고, 그의 저술은 범어(梵語)로 번역되어 서역제국과 천축(天竺)에까지 전해졌다.

원효의 입적

원효는 만년에 남산 아래 혈사(穴寺)에서 살다가, 신문왕 6년(686년) 3월 30일(그믐)에 칠십세(七十歲)로 입적했다.
장례는 토장(土葬)ㆍ화장(火葬ㆍ茶毘)도 아닌 한족(韓族) 전통장례에 따라 남산서봉(南山西峯) 권의감실(權宜龕室)에 시신을 안치했다.
3년이 지나 육탈(肉脫)하자 매장하지 않고 유골(遺骨)를 분쇄하여 석회(석고)를 섞어 소상(塑像)을 조성하여 분황사에 안치했다.
대각국사는 원효를 해동교주(海東敎主) 원효보살(元曉菩薩) 원효성사(元曉聖師)라 칭하였고, 고리(高麗) 숙종(肅宗)은
원효대성화쟁국사(元曉大聖和諍國師)라 증시(贈諡)하여 대성인 보살로 존숭했다.

※ 참고문헌 : 三國遺事. 宋高僧傳. 高仙寺誓幢和尙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