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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국사(普慈國師) 혜영(惠永)

해동교주화쟁국사(海東敎主和諍國師) 원효(元曉보자국사(普慈國師) 혜영(惠永) 사진

보자국사(普慈國師) 혜영(惠永)

탄생과 출가

국사의 이름은 혜영(惠永), 속성(俗姓)은 강 씨(康氏), 문경인(聞慶人)이다. 아비 자
원(子元)은 내원승겸한림원(內園丞兼翰林院)이요, 어미는 홍 씨(洪氏)로 조산대부
호부 시랑충사관수찬관(朝散大夫戶部侍郞充史館修撰官) 홍인연(洪仁衍)의 딸이다.
고종(高宗) 15년(1228년)에 출생했다. 11살에 수좌(首座) 충연(沖淵)의 당하(堂下)
에 들어가 남백월사(南白月寺)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17살에 왕륜사(王輪寺)
선불장(選佛場)에 뽑혀 처음으로 흥덕사(興德寺)에 주석했다. 고종 46년(1259년)
삼중대사(三重大師)를 제수 받고, 원종(元宗) 4년(1263년)에 수좌(首座)에 나아갔
다. 원종 8년(1267년)에 속리산(俗離山)으로 이주하였고, 원종 10년(1269년)에
승통(僧統)을 가(加)했다.

원종 15년(1274년)에는 불국사(佛國寺)로 이주하고, 충렬왕 2년(1276년)에는
통도사(通道寺)에 이르러 사리(舍利) 몇 알을 간청해 얻어 항상 좌우에 두었더니
분신(分身)이 많이 생겨 매양 달라는 사람에게 주어도 그 숫자가 줄지 않았다.
이 해에 중흥사(重興寺)에 이주하여 왕명으로 경연(京輦ㆍ開京)에 머물기를 무릇
9년, 다시 유가사(瑜迦寺) 주지로 옮겼다. 충렬왕(忠烈王) 16년(1290년) 사경승
(寫經僧) 100원(員)을 거느리고 원나라 대도(大都)에 가서 세조(世祖) 쿠빌라이 칸

의 각별한 위로를 받고 경수사(慶壽寺)에 우(寓)하여 법화경(法華經)을 금(金)으로 필사(筆寫)하는 역(役)을 엄숙히 행하니 경복(敬服)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국사(國師) 책봉

충렬왕 18년(1292년) 10월에 대사가 입경(入京)하자 국왕은 대장군(大將軍) 황원길(黃元吉)에 명하여 궁중의 말을 몰고 천수사(天壽寺)에
나아가 숭교사(崇敎寺) 별원(別院)에서 영입(迎入)하고 22일, 국사(國師)에 책봉했다. 그리고 법호(法號)를 ‘보자(普慈)’라 했다.
26일, 수녕전(壽寧殿)에서 왕이 군신을 이끌고 친히 오배지례(五拜之禮)를 올렸다. 또한,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에 가봉하고
동화사(桐華寺) 주지로 명했다. 충렬왕 19년(1293년), 왕대비전(王大妃殿)ㆍ대전(大殿)·중궁전(中宮殿)의 삼전(三殿)에
조근(朝覲·배알, 알현)하니 성도사(成道寺)에 주석케 하여 주법(主法)을 청했다.

입적(入寂)

충렬왕 20년(1294년) 5월 19일, 대사께서 몸이 불편하자 대수롭게 여기고 다만 음식이 부조(不調)하나 대중과 조용히 담소하며
태연자약했다. 5월 24일 새벽에 국왕께 올리는 유서(遺書)와 봉인(封印)을 행이별감(行李別監) 최홍단(崔洪旦)에게 부탁하고는 단정히
앉아 화엄경십지품(華嚴經十地品)을 거양(擧揚)하고 조용히 장서(長逝)했다. 얼굴빛과 모양이 선백(鮮白)하여 3일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였으며, 대지(大地)는 눈으로 덮여 백색(白色)이었다. 2월 초2일에 용수산(龍首山) 남강(南岡)에서 차비(茶毘)하여 유골을
수습하여 공산 동화사(桐華寺)에 탑을 세웠다. 향년이 67, 법랍은 56이며, 시호(諡號)를 홍진(弘眞)이라 하고, 탑호(塔號)를
진응(眞應)이라 했다.

※ 참고문헌 : 高麗國大瑜伽桐華寺住持五敎都僧統普慈國尊贈諡弘眞碑銘幷序. 奉翊大夫 副知密直司事 國學大司成 文翰學士 金晅 奉敎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