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

본문 내용으로 바로가기 메뉴으로 바로가기
임을 온전케 하온 마음 하늘 끝까지 미치니
첫화면으로 이동 > 인물 > 고승 > 원진국사(圓眞國師) 승형(承逈)

원진국사(圓眞國師) 승형(承逈)

원진국사비각 승형(포항 보경사) 사진

원진국사비각 승형(포항 보경사)

가문(家門)과 출가

국사의 속성(俗姓)은 신씨(申氏), 휘(諱)는 승형(承逈), 자(字)는 영회(永廻), 상락산양인(上洛山陽人ㆍ尙州屬縣)으로 가업(家業)은
유가(儒家)의 집안이다. 아비 통한(通漢)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금성태수(錦城太守)로 임지에서 별세하고, 어미 또한 일찍 세상을
떠나 3살 때 고아가 되어 숙부(叔父) 시어사(侍御史) 신광한(申光漢)이 키웠다.

7살에 운문사(雲門寺)의 연실선사(淵實禪師)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 신동(神童)으로 이름났다. 13살에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
동순사(洞純師)를 찾아가 머리를 깎고, 이듬해 금산사(金山寺) 계단(戒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는 명리를 싫어했고 명산에
유력(遊歷)함을 희망했다. 조계산(曹溪山)에 가서 보조국사(普照國師)에게 법요(法要)를 듣고, 오대산(五臺山)에 가서 문수보살(文殊菩
薩)에 예배하고 명감(冥感)을 얻었다. 청평산(淸平山) 문수원(文殊院)에 가서 진락공(眞樂公) 이자현(李資玄)의 유적을 찾아 『문수사기
(文殊寺記)』를 보다가 ‘수능엄경(首楞嚴經)은 곧 인심종(印心宗) 발명(發明)의 요로(要路)’라는 말에 이르러서 측연(惻然)이 이에 감동
하였다. 드디어 이 절에 주석하여 능엄경(楞嚴經)을 다 읽고 그 묘지(妙旨)를 궁구(窮究)하여 홍양법교(弘揚法敎)에 반드시 이것으로
머리를 삼았다. 이 법이 세상에 성행한 것은 대사로부터 비롯한다.

공산(公山)에 펼친 대사의 덕행

대사가 공산(公山) 염불난야(念佛蘭若)에 주석할 때 양삼도(兩三道)의 고승을 산(山) 동봉(東峯)에 모아 반회(伴會)를 열어 차(茶)를
다렸다. 대한(大旱)으로 모든 곡식이 다 타들어감에 차(茶) 한 잔을 바위 위에 올려놓고 ‘곡식이 모두 타들어가니 차마 볼 수 없나이다’
하고 아라한(阿羅漢)께 기도드리고 선월화상(禪月和尙)이 예참문(禮懺文)을 올렸다. 범창(梵唱)이 채 끝나지 않아서 단비가 문득 내려
밭이 흡족하니, 무릇 대사의 덕행(德行)이 이처럼 많았다. 당시 운문산(雲門山) 복안사(伏安寺)에는 농민반란군이 둥지를 틀고 작폐가
심하여 불교계의 두통거리였다. 대사가 법회를 열어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연설함에 군적(群賊)들이 모두 감동 참회하여 눈물을
흘리고 개과천선하여 경내(境內)가 평안했다. 이와 같이 영이(靈異)가 비일비재하여 사방의 학자들이 태산북두(泰山北斗)로 추앙하고
제자를 청하는 자 구름 같았다.

임종 게(偈)와 시적(示寂)

고종(高宗) 7년(1220년)에는 태상왕(太上王)의 친속(親屬)에 의하여 왕의 제4자(第四子)를 체도(剃刀)하여 제자로 삼으니, 그가 뒤에
진구사(珍丘寺) 주지(住持) 경지선사(鏡智禪師)다. 고종(高宗) 8년(1221년) 7월에 공산(公山) 염불사(念佛寺)로 이석(移錫)하여
원정(元正)ㆍ춘림(春林) 두 선사와 조용히 담도(談道)하고, 8월 28일에 머리를 깎고 깨끗하게 목욕 후 9월 초2일에 시자(侍者)로 하여금
옷을 갈아입히게 한 뒤 승상(繩床)에 앉아 창범(唱梵)을 명했다. 시자가 임종에 게(偈)를 청하니 그가 눈을 들어 빤히 쳐다보고는
‘이 어리석은 놈아. 내 평생에 일찍이 일게(一偈)도 않았거늘 무슨 게(偈)인가’하고 조용히 시적(示寂)했다.

이에 10월 10일, 문도(門徒) 50여인이 공산(公山) 남록(南麓)에서 차비(茶毘)했다. 때는 보령(寶齡) 51이요, 법랍(法臘) 37이다.
왕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국사(國師)를 추증하고 시호를 원진(圓眞)이라 했다. 유골을 수습하여 보경사(寶鏡寺)에 이장(移葬)하고
입탑수비(立塔竪碑)했다.

※ 참고문헌 : 高麗國寶鏡寺住持大禪師贈諡圓眞國師碑銘幷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