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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악대사(仁岳大師) 의소(義沼)

인악대사(仁岳大師) 의소(義沼) 사진

인악대사(仁岳大師) 의소(義沼)

탄생과 출가

속성(俗姓)은 이 씨(李氏)로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이름은 의소(義沼)이며,
자(字)는 자의(子宜)이다. 호(號)는 인악(仁岳)으로, 법명은 의첨(義沾)이다.
아비는 휘징(徽澄)이며, 어미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다. 영조(英祖) 22년
(1746년) 달성(達成) 인흥촌(仁興村;지금 달성군 화원면 본리동 인흥촌.
고려 때 유명한 仁興寺의 舊址)에서 출생했다.

8살에 향학(鄕學)에 들어가 『소학(小學)』을 읽음에 한번 들으면 깨달았으며, 백 줄이나 되는 그 책을 세 번 읽고는 곧 외워버렸다.
15살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 읽고, 문장(文章) 또한 뛰어나니 신동(神
童)이란 칭송이 고을까지 소문났다.
18살에 향객제자(鄕客諸子)와 용연사(龍淵寺)에 가서 공부하다가 마음에
느낌이 있어 가선헌(嘉善軒)에서 삭발하고 벽봉화상(璧峯和尙)에 구족계(具
足戒)를 받았다. 벽봉화상(璧峯和尙)이 그를 보고 큰 그릇임을 알고 금강경
(金剛經), 능엄경(楞嚴經)을 가르쳤다. 그리고 서악(西岳)·추파(秋波)·농암
(聾巖) 제명사(諸名師)에 나아가서 배우게 하여 그 학(學)이 더욱 밝게 되었다.

동화사에 주석하다

영조 44년(1768년) 봄에 다시 벽봉화상(璧峯和尙)을 만나 신구(信具)를 받으니 나이 22살이었다. 이로써 그는 임제하(臨濟下) 34세손이
되었다.(서산대사의 8세(世)요, 상봉(霜峯)의 5세손이다.) 또, 설파(雪坡)의 도성(道聲)을 듣고 가서 집지(執贄)하여 영원정사(靈源精
舍)에 배(拜)하고 잡화(雜華)의 강석(講席)에 참(參)하여 8개월에 끝내었다. 이어 선송(禪頌)을 받고 기사재(其渣滓)를 소융(消融)해서
선화(禪華)가 되었다. 이로부터 비슬산(琵瑟山)과 공산(公山), 황악산(黃岳山), 계룡산(鷄龍山)과 불령산(佛靈山)에 행화(行化)하여
법성(法城)을 진호(鎭護)했다. 팔공산에 돌아와 동화사에 주석하여 설법(說法)했다.

정조(正祖) 14년(1790년), 조정(朝廷)에서 수원 용주사(龍珠寺)를 창건하니 당대의 고승 의소(義沼)에 명하여 증사(證師)를 맡게 했다.
또한, 불복장(佛腹藏)의 원문을 짓게 했으며, 『경구소(慶溝疏)』와 『용주사제산장문(龍珠寺祭神將文)』을 짓게 했다. 용주사는
정조대왕이 효성(孝誠)에서 발원하여 심혈(心血)을 기울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원당으로, 당세의 고승으로 하여금 주관케 했다.
이에 대사가 발탁되어 소(疏)ㆍ문(文)을 지으니 정조대왕의 격찬과 존경을 받았다.

입적(入寂)

정조 20년(1796년)에 포산(苞山ㆍ琵瑟山) 명적암(明寂庵)에서 입적하니 세수 51, 법랍은 34이다. 그는 유불(儒彿) 혼합의 견지(見地)를
따랐고, 『화엄사기(華嚴私記)』 등의 저서가 있다. ‘만법일심(萬法一心)’을 주장하며 ‘천당(天堂)은 수미산 위에 있고 지옥(地獄)은
철위지간(鐵圍之間)에 있어 우리가 볼 수 없다’고 했다.

※ 참고문헌 : 扶宗樹敎華嚴講主仁嶽大師碑銘幷序. 吏曹判書 判義禁府事 金羲淳撰竝篆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