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

본문 내용으로 바로가기 메뉴으로 바로가기
산(山)자락에 깃든 구세와 호국의 염원
첫화면으로 이동 > 유산·유적 > 마애불 > 갓바위 석조여래좌상

갓바위 석조여래좌상

 관봉석조여래좌상 사진

관봉석조여래좌상

팔공산 관봉의 석조여래좌상

팔공산 동쪽, 관봉(冠峰·852m)에는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갓바위 부처가 좌정하고 있다. 신라시대
누가 발원하여 팔공산 동쪽 관봉(冠峰·852m) 정상에 자연석 화강암 바위를 다듬어 높이 6m 크기의 석조여래좌상을 만들었을까?

『한국사찰사전(1963)』에는 ‘신라 소지왕 13년(491년)에 극달화상이 선본사(禪本寺)를 창건했다’하고, 1821년 『선본사사적기(禪本寺
事蹟記)』에는 ‘의현대사(義玄大師)가 선덕여왕 7년(638년)에 갓바위 불상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갓바위 불상을 선덕여왕 7년(638년)에
의현대사가 조성했다는 것과 효공왕대 세웠다는 주장은 관련 문헌이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선본사에 전하는 삼층석탑과
석등부재, 불상대좌 등과 갓바위 불상의 조상 수법 등을 고려할 때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조성과 특징

갓바위 불상은 자연석을 살려 불신(佛身)과 대좌를 한 덩어리로 조각하였고, 뒤쪽의 병풍바위가 광배처럼 우뚝하다. 좌대를 포함한 전체
높이는 5.93m, 무릎 너비는 3.19m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의 불상이다. 항마촉지인의 표현양식에서 군위 삼존석굴과 토함산 석굴암 본존불
의 영향이 나타난다. 불상의 자세는 앞에서는 반듯하지만, 옆모습은 일부러 몸을 앞으로 굽혀 중생에게 다가가는 것처럼 보인다. 머리는
소발에 나발의 표현이 없으며 둥글고 높은 육계, 머리와 이마를 석탑의 지붕돌받침 같이 턱을 만들어 구분한 점은 군위삼존석불과 유사
하다. 둥근 육계 위에 올린 판석형의 보개(寶蓋)가 특징이다. 깨져 떨어져 나간 부분이 있지만 팔각형의 보개로 보이며, 보개 윗부분을
장식한 3단 문양의 가장 윗부분은 둥근 보주처럼 도드라지게 새겼고, 그 주위를 구름무늬로 꾸며 놓았다. 불상의 머리에 보개를 얹은 것은
고려시대에 유행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통일신라시대 갓바위 부처에서 처음 나타난 것으로 확인되었다.
갓바위 부처의 상호(얼굴)가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였고, 대좌형식이 고식(古式)인 점에서 8세기 불상의 특징이 보이나, 불신(佛
身)이 한 덩어리로 표현하였고, 가슴 이하의 부분은 양감(量感)이 드러나지 않으며, 전체 옷 주름이 매우 약한 음각선으로 처리한 것으로
볼 때 조성 시기는 9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이름

문화재청에서 갓바위 부처를 보물 제431호 관봉석조여래좌상(冠峰石造如來坐像)이라 지정했으나 세상 사람들은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로 굳게 믿고 있다. 『선본사사적기』에 ‘이 불상은 원광법사의 수제자 의현대사가 어머니를 위해 선덕여왕 7년(638년)에 이 여래좌상을
조성했다’는 기록과 군위삼존석굴의 아미타불, 경주 석굴암 본존불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로 보기도 한다.
경소재(景蘇齋) 이춘섭(李春燮·1737~1815)의 ‘좌정한 돌미륵(石彌勒)이 관(冠)을 쓰고 있었다’는 기록과 1872년 하양현지도에 ‘관암(冠巖)’
으로 표기된 것과 『화성지(花城誌)』에 나타나는 ‘관암미륵(冠巖彌勒)’이란 기록처럼 미륵불로도 불렸었다. 한편 학계의 연구결과, 항마
촉지인의 왼손에 아주 희미하게 둥근 지물이 얹혀있는 것처럼 보여서 약사여래불로 알려졌으나 이는 둥근 지물이 아니라 엄지손가락을
구부려 손바닥에 얹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갓바위 관봉석조여래좌상(야간) 사진

갓바위 관봉석조여래좌상(야간)

 와촌방향 조망

와촌방향 조망

갓바위 관봉석조여래좌상(정면) 사진

갓바위 관봉석조여래좌상(정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