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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자락에 깃든 구세와 호국의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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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흥암(百興庵)

백흥암 수미단 사진

백흥암 수미단

백흥암의 창건

인종대왕의 태(胎)를 안장한 태실봉(462m)의 남서쪽에 자리한 백흥암(百興庵)은 인종 태실(胎室) 수호사찰로 신라 경문왕 9년(869년) 구
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桐裏山門)을 개창한 혜철(惠徹ㆍ785~861) 국사의 발원으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절 주변에 ‘잣나무가 무성하
다’ 하여 백지사(柏旨寺)라 하였다. 고려시대 이전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태재(太齋) 유방선(柳方善·1388~
1443)의 ‘백지사에 머물며(寓柏旨寺)’라는 시가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중종 15년(1520년) 훗날 인종으로 등극한 왕세자의 태(胎)를 절 뒷산 태실봉(462m)에 봉안하면서 백지사는 ‘막중수호지소(莫重守護之
所)’로 왕실의 지원과 보호를 받아 크게 번창한다. 명종 1년(1546년) 천교(天敎)대사가 중창하고 ‘백지사(柏旨寺)에서 백흥암(百興庵)으로
사명을 개칭하였다’고 하나 백흥암중흥유공기(1810년)에 따르면, ‘영조 48년(1772년)에 설화(雪華), 도봉(道峰), 자암(紫巖) 3대선사가
절을 부흥시켰으므로 암자의 이름을 백흥(百興)이라 하였다’ 한다.

백흥암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인조 21년(1643년)에 극락전 중수를 시작으로 현종 14년(1673년)에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불과 여러
전각의 단청과 벽화가 조성되었다. 정조 22년(1798년) 정월, 경상감사가 발급한 완문(完文)에는 ‘백흥암은 막중한 수호처일 뿐 아니라
선조(先朝)대에 어압(御押)이 있어 지극히 존엄한 곳이므로 추호라도 침해하는 폐단이 있으면 즉시 감영에 보고하여 엄벌에 처한다’고 할
만큼 당시 백흥암의 위상은 여전했다.

백흥암의 수미단

보물 제486호로 지정된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須彌壇)은 우리나라 불단(佛壇) 가운데 최고의 작품이다. 조선 후기 왕실의 후원으로 조성된
백흥암 수미단은 불교 도상보다는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도상과 길상적 도상이 많이 조각되어 있다. 서수와 동물, 그리고 꽃과 구름문
등 30여 종의 문양이 지니고 있는 유ㆍ불ㆍ도교의 상징성과 아울러 현세 기복적인 길상적 상징성은 후대 궁중회화 및 민화의 길상적 도상
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수미단 도상 사진1

수미단 도상

수미단 도상 사진2

수미단 도상

명필의 보고

백흥암은 명필의 보고(寶庫)이다. 추사 김정희의 ‘산해숭심(山海崇深)’과 만파스님의 ‘시홀방장(十笏方丈)’을 위시해서 극락전과 보화루 편
액은 동화사 ‘봉서루(鳳棲樓)’ 편액을 썼던 기성대사(1693~1704)의 글씨이고, 시홀방장 옆의 남쪽 방에 걸려있는 ‘화엄실(華嚴室)’ 편액은
동화사 비로암 ‘대적광전(大寂光殿)’ 편액을 썼던 영파 성규(1728~1812)스님의 글씨이며, 보화루에서 ‘산해숭심(山海崇深)’ 편액과 마주
하고 있는 ‘백흥대난야(百興大蘭若)’ 편액은 연암 박지원의 손자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1807~1877)의 글씨이다.

극락전 사진

극락전

아미타 삼존불 사진

아미타 삼존불

극락전 닫집 사진

극락전 닫집

추사글씨 사진

추사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