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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자락에 깃든 구세와 호국의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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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원(龜巖書院)-서침, 서거정, 서사원

구암서원 사진

구암서원

구암서원은 1665년(현종 6) 세종 때 대구 출신으로 관직을 지낸 구계(龜溪) 서침(徐沈)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며, 뒷날 사가정(四佳
亭) 서거정(徐居正·1420~1488)과 서해(徐嶰· 1537~1559), 서성(徐渻·1558~1631), 서사원(徐思遠·1550~1615)을 차례로 추가 배향하여 달성
서씨 오현을 모신 서원이 되었다. 귀암서원이라 불리기도 한다. 서원은 처음에 대구 지역 달성 서씨가 모여 산 남산동 인근 연귀산(連龜山,
현 제일중학교)에 세워졌다가 동산동으로 이건하였으며, 대원군 때 훼철된 뒤 중건한 것을 1996년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 17길 20
(산격동) 연암공원 안으로 다시 이건하였다. 서원 내 숭현사(崇賢祠)가 1982년 3월 4일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구암서원이 처음 세워진 연귀(구)산은 서침의 호 구계, 그리고 서원 이름 구암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1665년 창건 당시에는
서침을 제향하는 사묘였다가, 1718년(숙종 44) 대구시 중구 동산동으로 이건하면서 서거정을 추가 배향하고 서원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어 이전 서침과 서거정을 주벽(主壁)으로 삼고 1741년(영조 17) 서성을, 1757년(영조 33) 서해를 추가 배향하였으며, 2008년
서사원을 마지막으로 추가 배향하였다. 1868년 서원훼철령에 따라 훼철된 뒤 1924년 복원하였으며, 1996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현 위치로 이건할 때 외문인 경앙문(景仰門)과 강당 등은 그대로 둔 채 숭현사와 묘정비 및 비각만 옮겨와 강당 등 나머지 건물들은 크게
확장시켜 새롭게 지었다. 현재 동산동에 남아 있는 옛 서원은 전통문화체험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서침은 본관이 달성(達城), 자가 성묵(聖黙), 호가 구계로 대구 출신이다. 달성 서씨는 대대로 현 달성공원 일대에 살았는데, 그 지역이
요새의 지형으로 성을 쌓기에 적합하여 국가에 헌납하고 남산동 일대로 옮겨 살게 되었다. 당시 세종이 보상 차 포상하려 하자, 서침은
이 대신 대구 지역민들의 세액을 줄여줄 것을 청하여 받아들여졌다. 이후 이곳 땅 일부와 함께 1433년(세종 15) 관직을 받게 되어 영해
부사 등을 지냈다. 뒷날 그의 이러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대구 유림들이 사묘를 세우게 되었다.

서거정은 자가 강중(剛中), 호가 사가정으로,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외손이며, 유방선(柳方善) 등에게서 배웠다. 1444년(세종 26)
문과에 급제한 뒤 세종과, 단종, 문종, 세조, 성종 5대에 걸쳐 45년 동안 관직생활을 하여 병조판서와 형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에
올랐으며, 23년 간 문형(文衡)의 자리인 대제학을 지냈다. 그는 시문으로 유명하여 『동인시화(東人詩話)』 등을 편찬하였으며, 『동문선
(東文選)』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국통감(東國通鑑)』,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의 편찬 작업에도 참가하였다. 개인
문집으로는 『사가집(四佳集)』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서해는 자가 정지(挺之), 호가 함재(涵齋)로 서거정의 고손(高孫)이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요절하여 문장과 행적을 크게
남기지 못하였다.

서사원은 자가 행보(行甫), 호가 낙재(樂齋)로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과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584년(선조 17) 학행으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구 지역 의병장이 되었으며, 1595년 청안 현감을 지냈다.
이후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은 채 선사재(仙査齋)와 연경서원(硏經書院) 경영과 강학에 전념하였다. 사후 문강(文康)이란
시호가 내렸으며, 선사재를 이강서원(伊江書院)으로 승호하여 그를 제향하였다. 저서로 『낙재집』이 있다.

서성은 자가 현기(玄紀), 호가 약봉(藥峯)으로 서거정의 현손(玄孫)이자 함재 서해의 아들이며, 이이(李珥)와 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1586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였다. 이후 도승지를 거쳐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11년 간 귀양살이를 하였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풀려나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왕을 호종하였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저서로 『약봉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