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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자락에 깃든 구세와 호국의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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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고서원(臨皐書院)-정몽주

임고서원 사진

임고서원

임고서원은 1553년(명종 6)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며, 뒷날 장현광(張顯光·1554~1637)과
황보인(皇甫仁·?~1453)이 차례로 배향되었다. 설립 다음 해(1554)에 바로 사액(賜額)을 받았는데,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
院)이 사액을 받은 지 5년 뒤의 일이다. 서원은 원래 고천리 부래산(浮來山) 아래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후 1603년(선조 36)
경북 영천시 임고면 포은로 447(양항리) 현 위치에 중건되고, 다음 해 다시 사액을 받았다. 정몽주의 옛 집터에 세운 개성의 숭양서원
(崧陽書院)에서 그를 제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고서원은 1인1사 원칙에 따라 1871년(고종 8)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
이후 1919년 존영각(尊影閣)을 세워 그의 초상을 모셨으며, 1965년 서원을 복원하여 위패를 환안하고, 1980년 복원한 서원 바로 옆에
정부의 보조를 받아 다시 확장, 복원하였다. 임고서원은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로 지정되었으며, 서원 앞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도 경상북도 기념물 제63호로 함께 지정되었다. 그 후 1991년 12월 16일 소장전적(所藏典籍)은 보물 제1109호로, 정몽주 초상은
보물 제111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2년 7월 18일 그의 유허비(遺墟碑)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2호로 지정되었다.

임고서원은 정몽주가 탄생한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서원 뒤편 부래산에는 정몽주의 아버지 운관(云瓘)과 어머니 변한국부인(卞韓國夫人)
이씨의 묘소가 있다. 장현광이 임진왜란 때 임고서원 부근으로 피난을 온 뒤 전란 후에도 이곳에 머물면서 서원의 중건과 경영에 깊이
관여한 까닭에 이 일대에 그의 학맥이 널리 퍼졌으며, 이러한 연유로 그는 사후 1643년(인조 21) 임고서원에 배향되었다. 그 뒤 계유정난
(癸酉靖難, 1453) 때 화를 당한 이 지역 출신 황보인이 복권됨에 따라 1787년(정조 11) 추가 배향되었다. 현재 서원 일대는 성역화사업으
로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으며, 한편에는 충효문화수련원을 새로 건립하여 전통문화 계승사업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정몽주는 경북 영천 출생으로 본관이 영일(迎日), 자가 달가(達可), 호가 포은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는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성균관 대사성 등의 관직을 지내는 가운데 명(明)과 일본에 여러 차례 사행을 다녀왔으며, 이성계(李成桂)의 막하에서
여진과 왜구 토벌에도 참전하였다. 그가 성균관 교수로 있을 당시 대사성으로 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으로부터 ‘동방리학지조(東方理
學之祖)’라 할 만하다는 칭송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고려의 운명이 다해갈 때 그는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의 자리에 있으면서
유교의 대의명분(大義名分)에 따라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다 이방원(李芳遠)의 일파인 조영규(趙英珪) 등에 의해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이때 남긴 「단심가(丹心歌)」는 충절의 마음을 담은 시조로 유명하다. 1405년(태종 5) 권근(權近)의 계청(啓請)으로 복관, 추증되고,
문충이란 시호가 내렸으며, 이후 그의 행적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렸다. 1517년(중종 12) 문묘에 배향되었다. 저술로
『포은선생문집』이 있다. 그는 목은 이색,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더불어 고려에 충절을 다 바친 인물로 ‘삼은(三隱)’이라 일컬어지며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황보인은 경북 영천 출생으로 본관이 영천, 자가 사겸(四兼)과 춘경(春卿), 호가 지봉(芝峰)이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나아간 뒤 1414년(태종 14)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중앙 관직을 거치는 가운데 특히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함경도 일대 북방
개척에 큰 공헌을 하였다. 관직은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며, 문종의 국상 총책임을 맡고 『세종실록』 편찬에 참가하였다. 어린
단종을 보필하던 중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좌의정 김종서 등과 함께 수양대군에 의해 참화를 당하였다. 오랜 시간 신원이 되지
않다가 근 300년이 지난 1746년(영조 22) 복관되었으며, 1758년 충정이란 시호를 받았다. 1791년(정조 12) 단종의 장릉(莊陵) 충신단에
배식되었다.

장현광은 경북 구미 출생으로 본관이 인동(仁同), 자가 덕회(德晦), 호가 여헌(旅軒)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일찍이 18세 때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지어 입지하였으며, 23세(1576, 선조 9) 때 조정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에도 연이어 관직
이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나아가도 곧장 사직하였다. 인조반정 후 다시 대사헌, 형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고 군량을 거둬 중앙으로 보냈다. 다음 해 인조가 삼전도
(三田渡)에서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입암산에 은거하다 얼마 후 세상을 떴다. 1657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강이란 시호가 내렸다.
앞에서 말한대로 임진왜란 중 입암산 일대에서 피난하면서 인근에 있는 임고서원에서 강학하고 불탄 서원을 중건, 경영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는 ‘리기경위설(理氣經緯說)’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며, 주역에 특히 조예가 깊었다. 문집인 『여헌집』과 독창적 내용을 담고
있는 『성리설(性理說)』, 주역 관련 『역학도설(易學圖說)』, 『용사일기(龍蛇日記)』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임고서원은 특이하게도 1965년에 복원된 서원과 이후 1980년에 복원된 서원 2개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데, 앞의 서원은 강당과 사당만
있고, 뒤의 서원은 사당인 문충사(文忠祠)와 강당을 비롯하여 동·서재와 문루인 영광루(永光樓), 비각 등 총 12동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보물 제1109호로 지정된 임고서원소장전적은 『임고서원고왕록』 등 총 10종 25책이며, 보물 제1110호로 지정된 정몽주초상은 그의 초
상 3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1629년 김육(金堉)이 비단 위에 모사한 것이다. 그리고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2호로 지정된 포은정
몽주 유허비는 1389년(공양왕 원년) 그가 부모상에 모두 시묘하며 3년상을 치른 것을 기려 세운 것으로, 그 후 잃어버렸다가 1487년(성종
18) 땅속에 묻혀있던 것을 찾아 비각과 함께 다시 세운 것이다.

임고서원 사진

임고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