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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자락에 깃든 구세와 호국의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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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서원(硏經書院)-이황, 정구, 정경세

연경서원 옛터(복원예정지) 사진

연경서원 옛터(복원예정지)

연경서원은 1565년 대구 일대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서원으로 사묘가 없이 세워졌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후 곧바로 학당인 애련당
(愛蓮堂)이 중건되고, 1613년(광해군 5) 사당을 세워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을 배향하였으며,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여러 건물
들이 중건되었다. 이황에 이어 1622년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가 배향되고, 1676년(숙종 2)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
1633)가 추가 배향되었다. 그리고 향현사(鄕賢祠)를 따로 세워 1635년(인조 13)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1532~1585)을 배향하고, 이어
1707년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1519~1592)을 추가 배향하였다. 최초 서원 설립 당시에는 인근에 승경인 화암(畵巖)이 있어서 화암서원
이라 불렸으나 연경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1659년 사액(賜額)을 받았다. 1871년 대원군 때 훼철된 이후 중건되지 못하였다. 원래 서원이
있었던 곳은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일대로, 현재 복원을 준비하고 있다.

연경서원의 설립은 이황의 서원설립운동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이황은 만년에 관학 교육의 문제점을 보완하고 참다운 선비를 양성할
목적으로 서원설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는데, 그는 자신의 제자 이숙량과 전경창을 앞세워 연경서원의 창건을 뒤에서 도왔다.
이러한 인연으로 연경서원의 창건기문을 그에게 부탁하게 되었으며, 그는 이를 연경서원의 창건을 주도한 제자 이숙량에게 쓰게 하고
대신에 기문의 발문(跋文)을 짓고, 「서원십영(書院十詠)」 마지막 아홉 번째에 연경(화암)서원을 포함시켜 낙성을 축하하였다. 이렇듯
연경서원은 낙동강 중류 대구지역에 퇴계학이 전파되는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연경서원의 경영과 강학은 이숙량, 전경창과 더불어 당시 대구지역 유학계를 대표했던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과 임하(林下) 정사철
(鄭師哲) 등이 함께 이끌었으며, 그들의 제자인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과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등이 이를 이어받으면서
연경서원은 대구지역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리고 연경서원의 유림들이 서사원을 필두로 그 제자들이 속속 한강
정구의 문하에 나아가게 되면서 퇴계학은 정구를 통해 대구지역에 더욱 확산되는 계기를 맞았으며, 마침내 정구가 만년에 성주에서
대구지역으로 옮겨 오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정경세도 대구 부사로 있으면서 연경서원 등의 강학 모임에 참석한 인연으로 뒷날 추가
배향되었다.

이황은 본관이 진성(眞城), 자가 경호(景浩), 호가 퇴계로 경북 안동 출신이다. 어릴 적 숙부인 이우(李堣)에게서 배웠으며, 34세 때인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주로 중앙에서 문한직(文翰職)을 지내다 1549년 풍기 군수를 사직하였는데, 이때 순흥에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의 사액을 청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을 받음으로써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게
하였다. 낙향 후 학문 연구와 강학에 전념하는 한편 서원설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일시에 전국에서 서원들이 세워졌다.
이후 관직이 연이어 제수되어 성균관 대사성과 홍문관 대제학,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찬성에 올랐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순(文純)이란 시호가 내렸으며,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그가 평소 강학하던 도산서당은 도산서원으로 바뀌어 그를 배향하였으며,
전국의 수많은 서원에서 그를 제향하였다.
그는 제자인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며, 본격적으로 ‘한국 주자학’의 시대를 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적인 저술로 『성학십도(聖學十圖)』,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자성록(自省錄)』, 『계몽전의(啓蒙傳
疑)』, 『리학통록(理學通錄)』, 『활인심방(活人心方)』 등이 있으며, 그의 저술을 한데 묶은 『퇴계전서(退溪全書)』가 간행되었다.

정구는 본관이 청주(淸州), 자가 도가(道可), 호가 한강으로 경북 성주 출신이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이다.
그는 김굉필의 도학을 계승하는 한편 안동의 퇴계 이황과 진주의 남명 조식 양 문하에 나아가 학통을 이었다. 천거로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580년(선조 13) 마침내 창녕 현감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방관으로 큰
활약을 하였으며, 강원도 관찰사와 형조 참판에 올랐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임해군(臨海君) 역모사건 때 관련자들을 용서할 것을
청하는 소를 올리고 대사헌을 사직한 뒤에 낙향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고 노력하였으며,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을 때도 앞장 서 반대하여 정치적으로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직후인 1623년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25년 문목(文穆)이란 시호가 내렸다. 대표적인 저술로 『심경발휘(心經發揮)』,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 『창산지(昌山志)』, 『역대기년(歷代紀年)』, 『고금회수(古今會粹)』, 『의안집방(醫眼集方)』
등이 있다.

정경세는 본관이 진주(晉州), 자가 경임(景任), 호가 우복으로 경북 상주 출신이다. 그는 일찍이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에
나아간 뒤 1586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상주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후 대구부사 등을 지냈고, 광해군 때 정인홍
(鄭仁弘)과 반목 끝에 삭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다시 관직에 나아가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사후 찬성
(贊成)에 추증되고, 문숙(文肅)이란 시호가 내렸다 문장(文莊)으로 바꿔 다시 시호가 내렸다. 대표적인 저술로 『우복집(愚伏集)』과
『상례참고(喪禮參考)』, 『주문작해(朱文酌解)』 등이 있다.

화암 사진

화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