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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자락에 깃든 구세와 호국의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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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서원(泗陽書院)-정구, 이윤우, 이원경

사양서원 사진

사양서원

사양서원은 1651년(효종 5)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대표적 제자이자 예학(禮學)의 대가인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며, 뒷날 그의 제자인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1569~1634)를 추가 배향한데 이어1694년(숙종 20) 현 위치
로 이건하면서 송암(松巖) 이원경(李遠慶)을 별묘에 배향하였다. 서원은 처음 금호강가인 대구시 북구 사양동에 세워졌으며, 옮겨온 곳은
이윤우의 세거지로 원래 위치와 멀지 않은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동서원길 15-10(신리)이다. 사양서당 강당인 경회당(景晦堂)이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사양서원이 처음 세워진 곳은 정구가 말년 강학한 곳이자 세상을 뜬 곳이기도 한 사양정사(泗陽亭舍)의 터로 추정되며, 1664년(현종 5)
이윤우가 추가 배향되자 1694년 그의 세거지로 옮겨 짓게 되었다. 1868년 서원훼철령에 따라 훼철되었으며, 지금은 강당인 경회당만
남아 있다.

정구는 본관이 청주, 자가 도가(道可), 호가 한강으로 경북 성주 출신이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의 외증손이다.
그는 김굉필의 도학을 계승하는 한편 안동의 퇴계 이황과 진주의 남명 조식 양 문하에 나아가 학통을 이었다. 천거로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580년(선조 13) 마침내 창녕 현감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임해군(臨海君) 역모
사건 때 관련자들을 용서할 것을 청하는 소를 올리고 대사헌의 직을 올린 뒤 낙향하였다.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을 때도 앞장 서 반대하여 정치적으로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직후인 1623년에 이조 판서에 추증
되었으며, 1625년 문목(文穆)이란 시호가 내렸다.
그는 관직생활로 바쁜 가운데서도 다방면으로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다. 성리학 관련 대표적 저술로 퇴계학단에서 많은 논란이 일어난
정민정(程敏政)의 『심경부주(心經附註)』를 경(敬)을 중심으로 전면 개찬한 『심경발휘(心經發揮)』 등이 있으며, 예학 관련 대표적인
저술로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 등이 있다. 그는 특히 예학 관련 많은 저술을 남겨 기호학파의 김장생(金長生)과 더불어
조선시대 예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거론된다.
한편 일찍부터 활발하게 강학활동을 펼쳐 이윤우 등 성주 인근의 유생들은 물론 중년에 이르면 대구 지역을 대표하던 서사원(徐思遠)과
손처눌(孫處訥) 등이 입문, 퇴계학이 이 지역에 뿌리내리는데 기여했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향리에 있던 회연초당(檜淵草堂)과 무흘정사
(武屹亭舍)에서의 생활을 접고 1612년에 대구 인근 노곡(蘆谷)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1614년 노곡정사가 불타자 다시 인근 사양동에
거처를 정하고서 연경서원(硏經書院)과 선사재(仙査齋, 후일 伊江書院) 등을 드나들며 강학과 저술 활동을 하다 고종을 맞았다. 사후
강학처인 사양정사에는 사양서원이, 회연초당에는 회연서원이 세워졌으며, 이밖에도 여러 곳에 그를 배향하는 서원이 건립되었다.

이윤우는 본관이 광주(廣州), 자가 무백(茂伯), 호가 석담으로 경북 칠곡 출신이다. 일찍이 정구의 문하에 나아갔으며, 1606년(선조 39)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광해군 즉위 후 사관으로 있으면서 정인홍(鄭仁弘)의 비위를 사실대로 적어 올렸다가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예조 정랑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631년 공조 참의에 올랐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는 초유어
사(招諭御史)의 직을 수행했다.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되고, 칠곡의 사양서원과 성주의 회연서원에 스승 정구를 따라 배향되었다. 저술로
『석담집』이 있으며, 낙촌(洛村) 이도장(李道長)이 그의 아들이고, 귀암(龜巖) 이원정(李元禎)이 그의 손자이다.

이건 당시 사양서원의 건축물로 묘우와 외삼문인 봉하문(鳳下門), 강당인 경회당, 동서재인 폄우재(貶愚齋)와 정완재(訂頑齋), 기타 부속
건물들이 있었으나, 대원군 때 훼철 후 사양서당으로 개판한 채 외삼문(5칸)과 강당(정면 5칸, 측면 1칸 반)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