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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자락에 깃든 구세와 호국의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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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서원(琴湖書院)-허조, 허후, 허조

금호서원 사진

금호서원

금호서원은 1684년(숙종 10) 처음 세워졌으며,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1369~1439)와 정간공(貞簡公) 허후(許詡·?~1453), 수찬공(修
撰公) 허조(許慥, ?~1456) 3인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서원은 문경공 허조의 출생지 인근인 경상북도 경산시 하
양읍 가마실길 2길 32-1(부호리)에 소재해 있다. 2003년 10월 27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49호로 지정되었다.
금호서원은 처음에 문경공 허조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684년(숙종 10) 하양읍 금락동에 세워졌으며, 1724년(경종 4) 서사동으로
이건한 뒤 1790년(정조14) ‘금호’라 사액을 받았다. 1871년 서원훼철령에 따라 훼철된 뒤 1923년 현 위치에 복원되었으며, 정간공 허후와
수찬공 허조가 추가 배향되었다.

허조(許稠)는 본관이 하양(河陽), 자가 중통(仲通), 호가 경암(敬菴)으로 경북 경산 출신이며,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의 문인
이다. 고려 말인 1390년(공양왕 2)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간 뒤 새 왕조인 조선에서도 태조, 정종, 태종, 세종 4대에 걸쳐 관직을
지내면서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개국 초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세우고 학제(學制)와 예약(禮樂), 문물제도
(文物制度)를 정비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속육전(續六典)』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편수 작업에 참가하였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기로 유명하여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술로 『허문경집(許文敬集)』이
있다.

허후(許詡)는 문경공 허조의 아들로 호가 일영(一寧)이며, 1426년(세종 8) 문과에 급제하여 좌부승지, 우참찬 등을 거쳐 예조판서와
형조판서에 올랐다. 문종이 승하하자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선왕의 고명(顧命)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보좌하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뒤 황보인과 김종서를 죽이자 그들의 무죄
를 주장하다 그도 거제도로 유배된 뒤 교살되었다. 영조 때 신원(伸冤)이 되었으며,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절을 바친 32명을
향사하기 위해 정한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포함되었으며,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받았다.

허조(許慥)는 정간공 허후의 아들로 호가 응천이다. 사육신 이개(李塏)의 매부이며, 단종 복위운동으로 화를 당한 김문기(金文起)와 사돈
사이이다. 1447년(세종 29)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수찬(修撰) 등을 지내다 부친 허후가 교살된 뒤 관직을 버리고 단종 복위운동에 참가
하였으나, 김질의 고변으로 탄로가 나자 자결하였다. 그의 시신은 사육신 등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1792년(정조 16)에 신원이
되어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1797년(정조 15) 단종의 장릉 충신단에 배식되었다. 한편 그와 그의 부친인 허후에게 1792년 정려
(旌閭)가 내려졌으며, 1814년(순조 14) 금호서원 인근(부호리 175-1)에 정충각(旌忠閣)이 섰다. 이 정충각은 2003년 경상북도 문화재자
료 제450호로 지정되었다.

금호서원의 건축물로 외삼문인 준도문(遵道門, 3칸), 강당인 수교당(修敎堂, 4칸), 재사인 성경재(誠敬齋, 4칸)가 있고, 성경재와 마주보는
곳에 사당이 있으며, 고사(庫舍) 등 기타 부속 건물들이 있다. 유물로 『금호세고(琴湖世稿)』 목판과 『경암선실기(敬菴先生實紀)』,
『허문경집』 등이 있다.

금호서원 여충각 사진

금호서원 여충각

금호서원 사진

금호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