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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자락에 깃든 구세와 호국의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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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서원(陽山書院)-홍로, 홍귀달, 홍언충

양산서원 사진

양산서원

양산서원은 1786년(정조 10) 경재(敬齋) 홍로(洪魯, 1366~1392)와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1438~1504), 우암(寓庵) 홍언충(洪彦忠,
1473~1508) 3인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따라 훼철된 뒤 1948년 옛 터에 양산서당을 세워 내려
오다 2015년 정부의 지원금을 받아 복원하였으며, 복원과 함께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1620~1674)와 수헌(睡軒) 홍택하(洪宅夏·1752~
1820)를 추가 배향하여 ‘부림오현(缶林五賢)’을 제향하는 서원이 되었다. 양산서원은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4길 32(남산리)에 자리 잡고
있으며, 1990년 8월 7일 소장해오던 홍여하의 『휘찬려사(彙纂麗史)』 목판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1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서원
경내 은행나무 한 그루와 담장 주위 버드나무 세 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양산서원이 세워지기 이전인 1649년(인조 26) 현 양산서원 터(세칭 한밤마을)에 홍로를 제향하는 용재서원(湧才書院)이 세워졌으며,
1783년(정조 7) 다시 이곳에 세덕사(世德祠)를 세워 홍로와 함께 홍귀달과 홍언충을 제향하다 3년 뒤 양산서원으로 승호하게 되었다.
양산서원의 터는 일찍이 홍로가 낙향한 뒤 삶을 마감한 곳이며, 양산이란 이름은 그의 행적이 수양산(首陽山)에 숨어살다 죽은 백이(伯夷)
·숙제(叔齊)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홍여하의 『휘찬려사』 목판은 1820~30년 무렵부터 양산서원이 보관해왔으며, 2011년 12월
『경재선생실기』 목판 등과 함께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보관된 뒤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속에 포함되었다.

홍로는 경북 군위 출신으로 본관이 부림(缶林), 자가 득지(得之), 호가 경재(敬齋)이다. 그는 일찍이 부친의 벗이었던 포은(圃隱) 정몽주
(鄭夢周)의 문하에 나아갔으며, 어릴 적 목은(牧隱) 이색(李穡)으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정몽주와 길재(吉再) 등 13인이 동화사에서
소풍 차 모였던 기록이 그의 실기 속에 남아있다. 그는 1390년(공양왕 2) 문과에 급제한 뒤 1년 여 만에 정4품직인 문하사인(門下舍人)에
까지 올랐으나,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 속에 모종의 계획을 품고 낙향하였다. 낙향 후 곧바로 스승 정몽주의 참화와 신왕조 건국의 소식을
접하고 곡기를 끊은 채 향년 27세에 자진순절(自盡殉節)하였다. 그가 세상을 뜨기 하루 전 조선이 건국되었다. 그의 행적은 오랜 동안 묻
혀 있다가 영·정조 시기에 이르러 전 왕조의 충절지사를 현창하는 분위기 속에서 드러나기 시작해 양산서원을 건립하는 등 그를 기리는
사업이 이루어졌다. 『경재홍로선생실기』가 남아 있다.

홍귀달은 경북 상주 출신으로 본관이 부림, 자가 겸선(兼善), 호가 허백정(虛白亭)이며,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그는 1461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4대에 걸쳐 관직 생활을 하며 대사헌, 대사성, 경기도 관찰사, 이조와 호조 및 공조판서를 두루 지냈
다. 특히 그는 세조와 연산군 때 두 차례 문형(文衡)의 자리인 홍문관 대제학에 오른 것에서 볼 수 있듯 문장으로 유명하였다. 연산군 때
손녀를 궁중에 들이라는 어명을 어겼다는 죄로 유배된 뒤 교살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고, 문광이란 시호가
내렸다. 『세조실록』과 『성종실록』 편찬에 참가하였으며, 어명으로 『역대명감(歷代明鑑)』, 『속동국통감(續東國通鑑)』,
『구급이해방(救急易解方)』 등의 편찬에도 참가하였다. 문집으로 『허백정집』이 있다.

홍언충은 홍귀달의 넷째 아들로 자가 직경(直卿), 호가 우암이다. 1495년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수찬과 예조정랑 등을 지냈다. 1504년
(연산군 10) 부친의 사건에 연루되어 형제들 모두 유배된 뒤 중종반정으로 풀려났으며, 이후 관직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당시 정희량(鄭希亮), 이행(李荇), 박은(朴誾)과 함께 ‘문장사걸(文章四傑)’로 일컬어졌다.
홍여하는 홍귀달의 5대손으로 자가 백원(百源), 호가 목재이다. 1654년(효종 6) 문과에 급제한 뒤 관직에 나아갔다. 37세(1654, 효종 8)
때 응지상소(應旨上疏)를 올렸다가 고산도찰방으로 쫓겨났으며, 40세(1659, 현종 즉위년) 때 경성판관으로 있으면서 다시 응지상소를 올
려 북방 군정의 폐단과 이후원(李厚源)의 붕당 행태를 지적하였다가 송시열로부터 큰 반발을 샀다. 41세 때 다시 병마사 권우(權堣)를 문
제 삼았다가 황간으로 유배된 뒤 낙향 후 다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휘찬려사(彙纂麗史)』와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일명 『동사제강(東史提綱)』) 등 특히 역사학 방면의 저술을 많이 편찬하였으며, 문집으로 『목재집』이 있다.
홍택하는 경북 군위 출신으로 자가 화로(華老), 호가 수헌이다. 1786년(정조 10)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과 이조좌랑, 사헌부지평에
올랐으며, 돈녕부도정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낙향 후 양산서원 중건과 경영에 힘을 쏟았다.

양산서원은 사당인 숭덕사(崇德寺)와 강당인 흥교당(興敎堂), 문루인 읍청루(挹淸樓)와 동·서재 및 전사청 등의 건물로 이뤄져 있으며,
현재 인성교육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휘찬려사』와 『경재선생실기』 목판을 보관해왔던 장판각 자리에 기념표석이 서 있으며, 서원
부근에는 척서정(陟西亭)과 양산폭포, 군위삼존석굴(일명 제2 석굴암) 등 명승고적들이 많이 있다.

양산서원 척서정 사진

양산서원 척서정

양산폭포 사진

양산폭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