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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자락에 깃든 구세와 호국의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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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곡서원(松谷書院)-유방선, 이현보, 이보흠

송곡서원 사진

송곡서원

송곡서원은 1712년(숙종 38) 세워졌으며,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1388~1443)과 대전(大田) 이보흠(李甫欽·1397~1457) 2인을 배향
하는 서원이다. 서원은 유방선의 유배지 인근인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애련길 188-22(애련리)에 소재해 있다.
송곡서원은 1702년(숙종 28) 유방선과 곽순(郭珣·1502~1545)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경현원(景賢院)을 세워 제사지낸 것에서 시
작 되었으며, 1712년(숙종 38) 송곡서원으로 승호하면서 이현보(李賢輔·1467~1555)와 심지원(沈之源·1593~1662)을, 그 뒤 다시 이보
흠과 윤봉오(尹鳳五·1688~1769)를 추가 배향하였다. 1868년 서원훼철령에 따라 훼철된 뒤 1965년 자리를 옮겨 현 위치에 복원되었으며,
6인 가운데 유방선과 이보흠의 위패만 다시 배향되었다.

유방선은 본관이 서산(瑞山), 자가 자계(子繼), 호가 태재로 개성에서 태어났으며, 고려 말 명신이자 문장으로 유명했던 사암(思庵) 유숙
(柳淑·1328~1368)이 증조이고,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인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이 외증조이며,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
1409)과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1369~1430)의 문인이다. 그는 1405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중 1409년(태종 9)
부친 유기(柳沂)가 민무구(閔無咎) 형제의 옥사에 연루되어 참형을 당하게 되면서 청주로 유배되었으며, 얼마 후 영천 은해사 부근 송곡
(松谷)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1415년 잠시 유배에 풀렸으나 다시 참소로 1427년(세종 9)까지 총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몇 년
뒤 그는 가솔들을 이끌고 강원도 원주 법천사(法泉寺) 부근에 은거해 살았으며, 세종이 관직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은 채 세상을 떴다.
그가 영천 유배생활 중 태재(泰齋)를 지어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기를 때 이 지역 출신인 이보흠이 문하에 들어왔으며, 귀양에서 풀려나
원주에서 지낼 때 서거정(徐居正)과 한명회(韓明澮), 권람(權擥), 성간(成侃) 등이 문하에 출입하였다. 그는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특히
영천 유배생활 중 수시로 팔공산을 오르고 산사를 찾아 승려들과 어울리며 차를 나누고 시를 지어 팔공산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저술로 『태재집(泰齋集)』이 있다.

이보흠은 본관이 영천(永川), 자가 경부(敬夫), 호가 대전으로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으며, 향리에 유배 중이던 유방선의 문하에 나아가
학업을 닦은 뒤 1429년(세종 11)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박사, 함양 군수, 대구 군수 등을 지냈으며,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와
『세종실록(世宗實錄)』 등의 편찬에 참가하였다. 1457년(세조 3) 순흥(順興) 군수로 있을 때 이곳에 귀양을 와 있던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와 모의하여 단종 복위를 꾀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귀양지 박천에서 교살되었다. 1698년(숙종 24) 단종이 사면됨에 따라 1738
년 (영조 14) 그도 신원이 되어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1791년(정조 15) 충장(忠壯)이란 시호가 내리고 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
술로 『대전선생실기(大田先生實記)』가 있다.

1965년 송곡서원이 복원될 때 유방선과 이보흠 2인이 배향된 것은 위 내용을 볼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송곡서원이 훼철되기
이전에 배향되었던 곽순과 이현보, 심지원, 윤봉오 4인의 행적은 밝혀져 있으나 본 서원에 배향하게 된 배경과 경위는 지역적 연고에 따른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송곡서원의 건축물로 사당인 경현사(景賢祠, 3칸)와 내삼문, 외삼문, 강당(정면 4칸,
측면 1칸 반), 서재(西齋)인 경의재(敬義齋, 3칸) 등이 있다.

송곡서원 사진

송곡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