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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자락에 깃든 구세와 호국의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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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공산성 사진

공산성

『고려사』 고종 42년(1255년), ‘공산성에 입보한 백성들이 양식이 떨어져 굶어 죽은 사람이 많았다’는 공산성(公山城)의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다. 손기양(孫起陽·1559~1617)의 『공산지(公山誌)』에 ‘삼한시대부터 성이 있었고, 고려 태조가 동수대전에서 견훤에게 패하자
피신하여 축성했다고 전하나 알 수 없다’고 했다. 최근 지표조사결과,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조각과 여말선초의 기왓조각이 발견되어 공산성
은 신라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공산성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으며, 동쪽은 완만하고 서쪽은 절벽으로 마치 키(箕)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엎어놓은 것과 닮았다. 공산성
의 서쪽은 깎아지른 절벽이라 따로 성벽을 쌓지 않았으며,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북쪽에 10척(약 3m), 동쪽과 남쪽에는 4척(약 1.2m)의
높이로 성벽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산성은 세종 16년(1434년)에 사용이 중지되었고, 중종 25년(1530년)에 이르러 산성의 기능이 상실
되었다. 선조 25년(1592년) 4월 21일. 왜적들이 대구성(大丘城)을 점령하자 부사 윤현(尹晛)은 동화사로 피했고, 많은 사람이 서사원과
서재겸의 일기의 기록과 같이 공산성으로 피난했다. 임진왜란 중에 조정은 험준한 곳에 있는 금오산성, 천생산성, 공산성 등을 수리하여
방어할 계책을 세우고 사명대사로 하여금 선조 29년(1596년) 2월, 승병과 인근 백성들을 이끌고 공산성을 수축하게 했다.

『공산지(公山誌)』에는 ‘공산성의 북문은 북쪽으로 부계와 통하고 동문은 동쪽으로 진불암과 수도사로 이어지고, 남문은 남쪽 천왕봉
아래 삼성령에서 부인사와 동화사로 오갈 수 있었다. 주봉 비로봉 동쪽에 공산성의 지휘소인 곡성대가 있었고, 북문 앞과 북쪽으로 이어진
성벽에 2곳의 격대(格臺)와 동북남 3곳의 성문루가 있었다’고 적혀있다. 공산성은 해발 900m가 넘는 높고 깊은 산속에 있어 적의 접근을
조기에 경보하기 위해 북쪽의 시루봉(726m)과 남쪽의 천왕봉(1192m)에 전초를 두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인조 17년(1639년), 조정에서 공산성의 수축을 검토했으나 경상감사 이명웅(李命雄)의 건의에 따라 가산산성(架山山城) 축성을 계기로
공산성은 폐기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 뒤 공산성은 신녕에서는 ‘구산성(舊山城)’이라 했고, 부계에서는 ‘고성(古城)’, 즉 ‘옛 성안’ 또는
‘이성안’이라 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의 성벽은 무너졌고, 그중 일부가 남아 공산성의 존재를 말없이 전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에 만든 ‘공산성 배치도’는 영천과 군위의 경계 표시와 영천지역에 해당하는 공산성의 성벽과 남문과 동문, 북문의 위치를 간략하게 그린
요도 로 남문에서 북문까지 성벽과 남문, 동문, 북문의 위치를 대략이나마 알게 되었다.

서쪽 경치 사진

서쪽 경치

출토 기와조각 사진

출토 기와조각

중성성벽 사진

중성성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