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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자락에 깃든 구세와 호국의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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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산성

용암산성 사진

용암산성

봉무동과 불로동 지역은 신라시대 금호강과 낙동강 수운을 이용하여 구축한 물류기지였다. 용암산성(龍岩山城)은 신라시대 봉무동과
불로동에서 평광동과 새미기재를 거쳐 하양~영천~경주로 이어지던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한 산성으로 대구시기념물 제5호(1988.05.30.)
로 지정됐다. 용암산성은 용암산(龍岩山) 정상(382m)을 중심으로 머리띠를 두른 듯한 테뫼형 산성이다. 산성은 흙과 돌을 섞은 토석혼축
형(土石混築形)이며, 둘레는 약 1㎞에 이르고 성문지(城門址)는 산성의 서남쪽과 동쪽에 남아 있다. 인접한 불로동 고분군과 산성에서 출
토된 토기 파편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축조된 토성(土城)이나 임진왜란 이후에 석성(石城)으로 보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옥천(玉泉)에 얽힌 전설

용암산성 동쪽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목을 축이기 위해 팠다는 옥천(玉泉)이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대구성이 함락되자 인근에
서 봉기한 의병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거병(擧兵)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현재도 용암산성의 동쪽에 있는 전설의 샘터는 항상 옥같이 맑은
물이 솟아난다고 해서 옥천(玉泉)이라 하며, 그 주위는 분화구 모양으로 깊이 파낸 흔적이 남아있다. 2006년부터 임진왜란 당시 용암산성
에서 대구지역을 사수한 의병들의 호국정신과 넋을 기리는 용암산성 옥천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왜군들의 만행을 참다못한 백성들이 누가 주동을 할 것도 없이 각처에서 몰려들어 그 수가 1천여 명을 헤아렸으나
의병들은 도저히 왜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수적 열세에다 조총(鳥銃) 등을 갖춘 왜적에게 의병들이 낫과 도끼 등을 들고
대항한다는 것은 어린이와 어른의 싸움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의병들은 어두운 밤을 이용, 왜군의 진지를 기습하여 전과를
올리는 게릴라식의 전법을 썼다. 그러나 왜적들도 처음 한두 번은 당했으나 피해가 늘어나자 의병을 추적하여 용암산성(龍岩
山城)을 에워쌌다. 용암산성은 경사가 가파르고 곳곳이 절벽이라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왜적들은 용암산성을 공격하다 사상자가 늘어나자 지구전(持久戰)으로 나왔다. 용암산성에는 샘이 없어 물을 구하지 못했다.
이를 간파한 왜적들은 마실 물이 없는 곳에서 버틸 태면 버텨보라며 용암산성에 이르는 길목을 차단하고 포위했다. 산성에는
밥 지어먹을 물은 고사하고 마른 목을 축일 물조차 없자, 의병들은 별동대를 조직, 한밤중에 산 아래에 내려가 물을 길어왔으나
왜적들의 매복에 걸려 성공보다는 실패하는 날이 많았다.

그러나 의병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굶어 죽으나 왜적에게 마찬가지인데 비록 산꼭대기지만 수맥을 찾아 깊이 파면
물이 나올 것으로 생각했다. 의병들은 산성 동쪽에서 수맥을 찾아 샘을 파기 시작했다. 조를 편성, 밤낮으로 샘을 팠으나
물이 나오지 않았으나 단념하지 않고 계속 샘을 팠다. 얼마나 깊이 팠는지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풀릴 정도였다. 이렇게 깊이
파자 하늘도 감동했는지, 바닥에서 얼음같이 찬물이 용솟음치듯이 솟아 나왔다. 이에 의병들은 너무나 기뻐서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이후 이 샘물은 의병들의 한이 맺힌 탓인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옥천 사진

옥천

옹암산성 안내 사진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