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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자락에 깃든 구세와 호국의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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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사(夫人寺)

부인사 사진

부인사

부인사의 창건

팔공산은 신라시대 약사신앙과 고려시대 교종과 선종불교의 중심지였다. 고려의 국지대보(國之大寶)이자 문명의 상징이었던 초조대장경
(初彫大藏經)과 속장경(續藏經)을 봉안했던 부인사(夫人寺)는 교종불교(敎宗佛敎)의 총 본산이었고, 거조사(居祖社)는 보조국사 지눌이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주창하여 고려불교의 혁신을 이끌었던 선종불교(禪宗佛敎)의 태두(泰斗)였다.

부인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2008년에 건립된 『부인사사적기』에는 ‘중악공산(中岳公山) 부인사(符仁寺)는 한국 제일의
호국 대가람이며 불법장흥(佛法長興), 법수장류(法水長流)의 성지다. 선덕여왕 13년(644년)에 일통삼한의 호국도량과 아울러 모후 마야
부인의 명복을 비는 원찰 부인사(夫人寺)를 창건했다’고 적고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2대 남해차차웅의 왕비를 운제부인(雲帝夫人)
이라 한 예와 같이 신라에서는 왕비를 부인(夫人)이라 호칭하였다. 통일신라시대 금당지 주변에서 발굴된 ‘부인사 금당(夫人寺金堂)’이
새겨진 암기와는 학계에서 8세기 이후에 제작되어 즙와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어 신라시대에 ‘부인사(夫人寺)’로 불렸던 사실이 확인된다.

초조대장경 봉안과 소실

거란의 대대적인 침입이 있었던 현종 대(1009~1031)에 국난극복을 타개하는 방편으로 초조대장경을 조성하였다. 현종 12년경(1021년)
현화사(玄化寺)에서 판각을 시작하여 문종 대, 혹은 선종 4년(1087년)에 완성을 보았다. 초조대장경은 현재 해인사에 봉안하고 있는 재조
대장경을 능가하는 엄청난 규모로 통일신라 이래 발달한 고려불교문화의 역량과 고려인의 자주정신과 높은 문화수준,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리경을 계승한 발달된 인쇄기술이 집약된 고려 최고의 보물로 개경의 현화사와 흥왕사(興王寺)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어떤 연유로 언제 초조대장경이 부인사로 옮겨졌을까? 여기에 관한 문헌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대구 임란 의병의 근거지

1592년 7월 6일, 부인사에서 대구지역 선비들이 향회를 열어 대구의병을 결성하고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1550∼1615)을 의병대장으
로 추대한다. 대구읍내와 수성(守城), 해안(海顔), 하빈(河濱) 3개 현을 20개 지역으로 나누어 향병장과 유사를 두고 공산의진군(公山義陣
軍)을 결성하여 부인사에 의병소를 두고 동화사의 관군과 유기적인 연락을 취하면서 조직적으로 활동하였다.

선덕여왕 숭모제로 명맥을 잇다

『부인사사적기』에는 1928년의 대화재로 전각 전체가 불타고 ‘선덕묘(善德廟)만 남았다’는 기록으로 오래전부터 음력 3월 보름에
선덕여왕 숭모제를 지내왔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자리로 선덕묘를 이전하면서 ‘숭모전(崇慕殿)’이라 편액하였다. 수천 명의 스님이 구름
처럼 모여들어 승시가 열렸던 고려시대 부인사의 경내는 산 아래 신무동마애불좌상(대구시 유형문화재 제18호)이 포함될 만큼 사세가
대단했다고 전하나 팔공산순환도로에 인접한 포도밭에는 부러져 흔적만 남은 당간지주가 부인사의 옛 모습을 알리고 있다.

선덕여왕 숭모전 사진

선덕여왕 숭모전

부인사 당간지주 사진

부인사 당간지주

부인사 삼층석탑 사진

부인사 삼층석탑

부인사 석부자재(옛 흔적) 사진

부인사 석부자재(옛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