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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자락에 깃든 구세와 호국의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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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사(松林寺)

일주문 사진

일주문

송림사의 창건

팔공산의 대표적인 원림(園林)인 심원정(心遠亭)과 마주하고 있는 송림사(松林寺)는 팔공산에서는 보기 드문 평지형 사찰이다.
‘팔공산송림사(八公山松林寺)’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들어서면 5칸 규모의 무설전(無說殿)이 반긴다. 대웅전 앞 중정(中庭)의 중앙에는
보물 제189호(1963.01.21.)로 지정된 오층 전탑이 웅장한 모습을 자랑한다.
1980년에 건립된 『송림사유적비』에는 ‘신라 19대 눌지왕 때에 묵호자(墨胡子)가 단을 세워 불법을 전하면서 송림사(松林寺)라 이름
하였고, 21대 소지왕 때 가람을 비로소 건립하니 그 유래가 아득하다. 24대 진흥왕 5년(544년)에 각덕조사가 양나라 사신과 함께 귀국할
때 가져온 불사리를 흥륜사에 봉안한 뒤에 불사리를 유수명산에 나누어 봉안하여 호국안민의 기원보탑을 세우니 지금의 송림보탑이며,
석단 위에 벽전(甓塼)을 쌓고 금동산륜이 허공을 가리키니 통일신라의 기상이 분명하고도 뚜렷하다’고 적혀 있다.

신라 북방진출의 전진기지

오층 전탑은 경주와 송림사가 매우 긴밀한 관계였음을 알려주는 증표이다.
전탑은 당나라에 유학했던 왕족과 스님들을 통해 경주에 먼저 전해졌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석장사지 전탑이나 634년에 건립된 분황사 모전석
탑이 그것이다. 학계에서는 경주의 영향을 받아 불암사(석굴암) 모전석탑
과 송림사 전탑이 세워졌고 안동지역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고 있다.
진평왕 때 팔공산은 신라가 북방으로 진출하는 전진기지였다. 송림사는
남북으로 달구벌과 연결되고 동서로는 팔공산과 연결되는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에 위치했다. 신라의 북방진출로는 경주에서 영천을 지나 신녕에서
북쪽으로 갑령 너머 탑리로 이어지고, 북서쪽으로는 일선군(지금의 구미·
선산)을 거쳐 상주로 이어진다.

송림사 오층전탑 사진

송림사 오층전탑

보감국사(寶鑑國師) 혼구(混丘)

보감국사(寶鑑國師) 혼구(混丘)는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의 제자로 스승이 평생 집필한 『삼국유사 초고』를 운문사에서 손수
정리하여 인각사에 주석하던 보각국존(普覺國尊)에게 올렸다. 국사의 호는 무극(無極)이다. 『삼국유사』에 ‘무극기(無極記)’라 한 ‘전후
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와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 두 편이 국사가 쓴 것이다. 고려 충숙왕 9년(1322년) 10월, 밀양
영원사에 머물던 보감국사는 송림사로 옮겨 병을 치료하다 열반에 들었던 만큼 송림사와 인연이 깊었다.

가산산성 축성의 중심사찰

송림사는 1649년부터 1665년까지 약 16년 동안 대대적으로 중창된다. 1657년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조성에 참여한 271명의 승려 중에
송림사 승려가 159명이며, 1665년 시왕상 조성에 참여한 325명의 승려 가운데 161명이 송림사 승려였던 것으로 보아 당시 송림사는 팔공산
가장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 가산산성 내성은 인조 18년(1640년)에 착공하여 인조 26년(1648년)에야 완성되고 팔거현(八筥縣)이 칠곡도호
부로 승격하여 180년간 산성 안에 자리한다. 가산산성 외성(外城)은 숙종 26년(1700년)에 축조하였고, 중성(重城)은 영조 17년(1741년)에
완성을 보았다.

기성대사(箕城大師) 출가 사찰

송림사는 조선 후기 팔공산을 대표하는 선승 기성대사(箕城大師)가 13살 때 출가한 사찰로 옛 동구(洞口)에 대사의 비각(碑閣)이 서 있다.
근세에는 벽봉(碧峰), 성덕(性德) 두 선사가 선풍을 떨쳤고 퇴락한 송림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일신(日新)하였다. 대웅전 뒤에 벽봉(碧峰),
성덕(性德) 영세불망비와 부도가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 사진

대웅전

부도전 사진

부도전

삼천불전 사진

삼천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