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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자락에 깃든 구세와 호국의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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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석굴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

삼존석굴 사진

삼존석굴

제2석굴암의 옛 이름은 불암(佛巖)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됐다는 국보 제109호(1962.12.20.) 팔공산 아미타삼존석굴을 알리는 ‘제2석굴암’은 잘못된 이름이다.
1962년 9월 28일 자 경향신문에서 ‘제2석굴암 발견 팔공산 기슭서 세 부처 안치’라는 제하에 ‘해방 후 문화재 발견으로는 가장 큰 것’이라고
크게 보도한 것에서 연유한다. 불국사 석굴암보다 100년 앞서 조성되었다는 학계의 정설로 보건대, ‘제1석굴암’으로 부르던지, 아니면 불암
(佛巖)이란 옛날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1927년에 이곳 삼존석굴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이보다 훨씬 앞선 선조 29년(1596년)에 오한(鰲漢) 손기양(孫起陽·1559~1617)은
‘부계상촌 서쪽에 우뚝 솟은 바위절벽이 있는데, 암면의 석굴에 감실이 있으니 그 안에 석불 삼구가 봉안돼 있다. 세상에서 이곳을 불암
이라 부른다(缶溪上村西有巖削立百餘巖面有穴如龕內安石佛三軀俗號佛巖)’며 삼존석굴에 관한 시를 남겼다.

우리나라 최초의 석굴사원

팔공산 아미타삼존석굴은 인도의 아잔타석굴과 중국의 돈황석굴, 운강석굴,
용문석굴의 영향을 받아 자연동굴에 조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석굴사원이다.
자연석굴을 다듬어 감실(龕室) 형태로 조성했다는 점과 인도와 중국의 석굴
사원 양식이 경주 토함산 석굴암에 이르는 경로라는 점에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석굴은 지상에서 약 10m 높이의 바위절벽 중턱에 있으며, 입구는
동남쪽을 향해 있어 천왕봉을 비롯한 팔공산 종주 능선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팔공산 아미타삼존석굴은 1962년 9월 22일, 신라오악조사단에 의해 학계에
처음 알려졌다. 이때 조사에서 석굴의 폭은 380㎝, 높이는 425㎝, 깊이 430㎝
이고, 주불 총 높이는 288㎝, 좌협시보살상 높이 192㎝, 우협시보살상 높이
180㎝로 확인되었다.
삼존석굴 아미타불상은 얼굴이 크고 상체가 우람하나 무릎 폭이 좁아서 선덕
여왕 13년(644년) 이전에 조성된 삼화령미륵삼존상의 조성 비례와 흡사한데,
이런 특징은 삼국시대 말기에서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나타나는 독특한 조형
양식이다. 삼존석굴의 주불은 당대(唐代) 불상에서 주로 나타나던 편단우견에
오른쪽 어깨에 편삼을 걸친 착의법을 하고 있는데, 이는 신라불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편삼착의 사례이다.

비로자나 석불 사진

비로자나 석불

팔공산 성지화의 상징

왜 아미타삼존불상을 팔공산 자락에 조성했을까?
기존의 신라왕경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던 왕경오악(王京五岳)은 삼한일통으로 신라영역이 확장되자 전국적인 산악신앙으로 확대하여
공산을 중악(中岳), 토함산을 동악(東岳), 계룡산을 서악(西岳), 지리산을 남악(南岳), 태백산을 북악(北岳)으로 비정하고 가장 먼저 중악
공산의 성지화를 추진했을 것이다. 군위석굴 아미타삼존불의 규모나 조각수준 등으로 볼 때 오악(五岳)의 성립과 더불어 불교와 산악신앙
이 습합(習合)하는 공산성지화의 가장 중요한 사업의 하나로 추정된다. 이를 계기로 산악신앙과 불교가 접촉 결합된 신앙체계가 전국으로
확대되어 주로 산 정상부에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불좌상,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
좌상 등이 조영되었다.
군위석굴 아미타삼존불은 삼한 통일전쟁에서 희생된 영혼들의 왕생극락을 기원하고 현세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해 아미타불이 석가불
의 몸을 빌려 사바세계에 내려와 중생을 제도한다는 현세구복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군위 삼존석굴 모전석탑 사진

군위 삼존석굴 모전석탑

오한지 불암 문헌이미지

오한지 불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