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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자락에 깃든 구세와 호국의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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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사(銀海寺)

은혜사 지장전 사진

은혜사 지장전

은해사의 창건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銀海寺)는 제9교구 본사 동화사(桐華寺)와 더불어 팔공산을 대표하는 사찰의 하나이다. 『은해사
사적비(銀海寺事蹟碑)』에는 ‘신라 헌덕왕 1년(809년)에 혜철국사(惠哲國師)가 지금 운부암(雲浮庵) 아래 해안평(海眼坪)에 대가람을
짓고 해안사(海眼寺)라 했다. 고려 원종 10년(1269년)에 원참조사(元旵祖師)가 대법회를 열어 중생제도에 힘썼고, 충렬왕 15년(1289년)에
홍진국사(弘眞國師)가 대중창했다. 조선 인종 1년(1545년)에 대화재로 7대 보물과 사찰이 전소(全燒)하자 명종 1년(1546년)에 천교화상
(天敎和尙)이 해안평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짓고 절 이름을 은해사로 고쳤다’고 적고 있다.

인종태실

은해사는 중종 16년(1521년) 태실봉에 인종태실이 봉안되면서 팔공산의 중심 사찰로 거듭난다. 이런 사실은 중종 26년(1531년)에
은해사판 『묘법연화경 간행기』에 ‘경상도영천군공산본사(慶尙道永川郡公山本寺)’라고 한 것과, 선조 39년(1606년)에 간행한 『고봉화
상선요(高峰和尙禪要) 간행기』에 ‘영천팔공산본사은해사(永川八空山本寺銀海寺)’라 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17세기 동화사에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 설치되자 팔공산에서 은해사의 영향력은 이전보다 약화하였다. 그러나 『승정원일기』
철종 3년(1852년)에 ‘경상도 은해사는 인종대왕 태실봉산으로 영조 48년(1772년)에 특별히 원당(願堂)으로 삼아 종친부에 속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후기에도 인종대왕 태실의 수호사찰과 왕실 원당으로서의 위상은 여전했다.

추사 김정희 글씨의 보고

은해사는 헌종 13년(1847년)에 일어난 대화재로 극락전을 제외한 1,000칸의 가람이 소실되어 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유적과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당시 주지 혼허(混虛) 스님의 원력으로 복원하여 사격(寺格)을 유지할 수 있었다. 혼허 스님은 새로 지은 법당과
전각에 평소 가까이 지내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를 받아 현판을 걸었다. 이후 은해사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
1856)의 글씨를 보고자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오는 팔공산의 명소가 되었다. 은해사가 소장한 글씨는 모두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그중에서 ‘불광(佛光)’은 송판 4장을 가로로 이어 새긴 세로 135㎝, 가로 155㎝ 크기의 대작으로 추사의 글씨 가운데
가장 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불(佛)’자의 세로획 길이가 130㎝나 될 정도로 매우 길어 보는 이의 눈길이 저절로 끌린다.

보화루
은해사 보화루 사진

은해사 보화루

은해사의 누문(樓門)은 보화루(寶華樓)이다. ‘보화(寶華)’란 보배로운 꽃으로 부처님이 앉아 계신 연화대좌를 말하며, 『법화경 비유품』의
‘보화승족(寶華承足)’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산내 암자인 백흥암과 운부암, 그리고 말사인 부귀암(富貴庵)과 죽림사(竹林寺)의 누문을
모두 보화루라고 한 것은 여느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예이다.
현재 은해사 금당은 ‘극락보전(極樂寶殿)’이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67호(1999.08.09.)로 지정될 당시 대웅전에 아미타불과 아미타
삼존탱화를 봉안했다는 기록으로 보건대, 헌종 13년(1847년)의 화재로 대웅전이 소실되자 극락전에 추사 김정희가 쓴 ‘대웅전(大雄殿)’
편액을 걸었다가 2009년 10월 11일, 은해사 개산 1200주년 개산대법회에서 대웅전에서 극락보전으로 편액을 교체하고, 추사의 대웅전
글씨는 성보박물관에 보관했다.

극락보전 사진

극락보전

아미타삼존불 불상 사진

아미타삼존불

쌍 거북 바위

성보박물관 뒤쪽 연못가에는 쌍 거북 바위가 있다. 거북바위는 건강과 화목 그리고 소원성취를 비는 곳으로 영험했다고 하며, 특히 조선
시대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보러 한성(漢城)으로 떠날 때 합격을 기원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일제 강점기에 한민족의 정신문화를 말살할
목적으로 일본인들이 쌍 거북 바위의 목을 잘랐다고 전한다. 2005년 4월, 주변을 정비하던 중에 목이 잘린 거북이 한 마리를 발견하여
주민들의 고증을 거쳐 후면의 마애삼존불과 함께 복원했다.

성보박물관 사진

성보박물관

금포정 사진

금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