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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신비한 돌을 감추니 사적의 기록이 환히 빛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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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 일대 금석문

팔공산의 남사면에는 ‘동화사사적비’와 ‘수릉향탄금계(綬陵香炭禁界)’, ‘수릉봉산계(綬陵封山界)’, ‘거연천석(居然泉石)’,
‘파계사 원당봉산(願堂封山)’, 숭정처사유허비 등의 금석문이 전한다.

동화사적비(桐華寺蹟碑)

동화사 옛 일주문인 봉황문(鳳凰門)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금당선원 아래에는 인악대사를 비롯한 고승대덕들을 기리는
두 채의 비각(碑閣)과 14기의 비석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비림(碑林) 옆으로 1931년 우당거사(藕堂居士) 김정래(金鼎
來)가 짓고 긍석산인(肯石山人) 김진만(金鎭萬) 글씨를 쓴
동화사적비(桐華寺蹟碑)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동화사 사적비는 자연 암반을 반듯하게 파낸 뒤에 평평하 다듬고
글씨를 새겼을 뿐만 아니라 위쪽에 두 마리의 용을 양각으로 새겨
여느 사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어
장엄하기가 그지없다.

사적비 앞 돌기둥에는 아래와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동화사적비 사진

동화사적비

天藏秘石 / 하늘이 신비한 돌을 감추니
記事有煌 / 사적의 기록이 환히 빛나네.
慈眼視衆 / 인자한 눈으로 중생을 보니
福聚无量 / 복이 모여 헤아릴 수 없네.

수릉향탄금계(綬陵香炭禁界)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1호(1990.05.15.)로 지정된 ‘수릉향탄
금계(綬陵香炭禁界)’ 표석은 동화사 집단시설지구 내 팔공산자연
공원관리 사무소 앞 넓은 화단에 자리하고 있다. 이 표석은 현
위치에서 l00m 아래쪽에 있었으나, 주변 조경 및 정비계획에 따라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수릉(綏陵)은 조선 헌종 아버지의 능으로,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東九陵)에 있다. ‘수릉향탄금계’란 수릉에 사용되는 목탄(木炭)의
생산을 위해 나라에서 출입을 금한다는 표석이다. 팔공산에는
수릉(綏陵)과 관련하여 동화사 집단시설지구에 ‘수릉향탄금계’와
수태골에 ‘수릉봉산계’라는 표석이 두 곳에 있어 이곳

수릉향탄금계 사진

수릉향탄금계

집단시설지구와 수태골 일대의 산림을 나라에서 보호림으로 정해 출입을 금지했음을 알 수 있다.

수릉봉산계(綬陵封山界)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3호로 지정된 ‘수릉봉산계(綬陵封山界)’
는 수태골에서 약 1㎞ 올라간 등산로 오른쪽에 있다. 화강암 재질의
자연석으로 정면에서 볼 때 삼각형의 모습으로, 명문이 음각된 곳의
위쪽이 튀어나와 자연적인 갓의 형태를 하고 있다.
‘수릉봉산계(綬陵封山界)’ 다섯 자의 행서 글씨가 2열 종서로
배치되어 있다. 마지막 ‘계(界)’자는 종서된 두 글자의 중앙 부분에
위치한다.

수릉봉산계 사진

수릉봉산계

거연천석(居然泉石)

수릉봉산계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팔공산의 장관 중의 하나인
느리청석이 있다. 길이 100m 이상, 폭 수십 미터의 바위가 급경
사를 이루고 있는데 그 아래 4m 높이에 ‘거연천석(居然泉石)’이
170㎝×45㎝ 크기로 횡서로 새겨져 있다. 밑에는 종서로 ‘서석지
(徐錫止)’라고 이름을 새겼다.
팔하(八下) 서석지(徐錫止ㆍ1826~1906)는 당대 손꼽히는 명필로
시(詩)·서(書)·화(畵)·금(琴)·기(棋)·박(博)·의(醫)·변(辯)에 능해
‘팔능거사(八能居士)’로 불리며 조선말기와 근대기에 서화가로
이름 높았던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를 길러 낸 스승이다.
거연천석의 ‘거연(居然)’은 ‘편안한 모양, 앉아서 꼼짝하지 아니

거연천석 사진

거연천석

하는 모양’의 의미이다. 즉, ‘자연 속에 있으니 편안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고, ‘변하지 않고 언제나 그대로인 산수의 경치’를 뜻하는 것으
로 볼 수도 있다.

원당봉산(願堂封山)

파계사 원당봉산(願堂封山)은 왕실의 안녕과 명복을 기원하던
원찰인 파계사의 경계를 알리는 표석이다. 원당봉산은 수태골에
있는 ‘수릉봉산계(綬陵封山界)’와 같이 산림을 보호하고 범인의
출입을 통제할 목적으로 세웠다. 이 원당봉산 표지는 파계사
경내에서는 볼 수 없고 한티재에서 파군재 방향으로 약 400m
되는 지점의 오른쪽에 있다.

원당봉산 사진

원당봉산

숭정처사유허비(崇禎處士遺墟碑)

파계사에서 부인사 방향으로 오다가 ‘대구교육팔공산수련원’
입구에서 신무교 아래를 지나 용수동 방면으로 약 1㎞ 정도
내려와서 팔공산기독 연수원 안으로 들어가면, 용수천에서
북서쪽 건너편에 숭정처사유허비(崇禎處士遺墟碑)가 우뚝
하게 서 있다.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비문을 짓고 정시용(鄭始容)이 글씨를 썼다. 높이는 520㎝
남짓하고, 폭은 260㎝, 두께는 280㎝로 무게는 족히 수십
톤이 넘는 커다란 자연석에 새긴 비석으로는 팔공산 일대
에서 이보다 더 큰 비석은 찾아볼 수 없다.

숭정처사유허비 사진

숭정처사유허비

대암(臺巖) 최동집(崔東㠍·1586~1661)은 명나라가 망하자 팔공산 부인동에 들어가 농연 위에 집을 짓고 은둔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
다. 이로써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 불렀다. 백불암(白拂庵) 최흥원(崔興遠)이 채제공(蔡濟恭)에게 청해 비문을 받았지만 정작 비를 세운
것은 최흥원의 증손자 지헌(止軒) 최효술(崔孝述·1786~1870)이다. 최효술(崔孝述)은 『농연입석기사(聾淵立石記事)』에서 ‘계미년(癸未
年· 1823년) 봄에 농연에서 이 돌을 발견하고 세우려고 애를 썼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3년이 지난 병술년(1826년) 봄에 돌을 세우게 된 과
정’을 소상하게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