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

본문 내용으로 바로가기 메뉴으로 바로가기
턱턱 쌓아 올린 돌담에 무심(無心)한 세월 배이고
첫화면으로 이동 > 민속·문학 > 민속 > 백불고택 경주최씨 종가

백불고택 경주최씨 종가

비보숲 사진

비보숲

대구 유일의 전통종가

임진왜란 이후 신분구조의 변동으로 양민과 천민의 수가 줄어들자 촌락사회는 종법사상(宗法思想)의 확산에 따라 신분의 고착화를 위해
혈연의 응집을 도모하면서 씨족마을이 증가했다. 1930년 무렵, 우리나라에는 전체 마을의 과반수에 가까운 1만5천 개의 동성마을이
있었고, 대구지역에도 60여 개의 동성촌락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1960년대 이후 대구도심의 확장과 급격한 개발로 모두
사라졌다. 대구에서 유일하게 전통종가의 전통을 잇고 있는 옻골 경주최씨종택(慶州崔氏宗宅)은 중요민속문화재 제261호(2009.06.19.)
로 지정되었다.
옻골 마을은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있는 자연촌락이다. 둔산(屯山)은 옛적 군사를 주둔 시킨 둔전(屯田)에서 유래했다고 하나,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에는 ‘둔가(屯家)나 둔창(屯倉)은 곡식을 거두어서 갈무리하는 곳’을 뜻한다고 하여 둔산은 ‘곡식이 가득한
둔덕’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 주변에 옻나무가 많아 ‘옻골’ 또는 ‘칠계(漆溪)’라고 한다. 최동집(崔東㠍·1586~1661)의 『대암집
(臺巖集)』과 이상정(李象靖·1710~1781)의 『대산집(大山集)』에 ‘칠계(漆溪)’의 지명이 있어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지하철 1호선 방촌
역에서 ‘경주최씨 종가’ 안내표지를 따라 골목길을 들어가면 대구공항 오른쪽 경계와 만난다. 경부고속도로 아래를 지나면 해안초등학교
가 나온다. 해안초등학교의 교명은 이곳의 지명이 치성화현(雉省火縣) 또는 미리현(美理縣)이라 했으나 신라 경덕왕 때 해안현(解顔縣)으
로 고쳤던 것에서 유래한다.

비보림

옻골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야트막한 언덕과 연못이 있고 족히 수백 년은 묵었을 느티나무 몇 그루가 마을을 가리고 있다. 이 비보림
(裨補林)은 1650년대 입향조 최동집의 증손 최수학(崔壽鶴)이 조성한 것으로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예로부터 종가 마루에서 ‘금호강이 보이면 해롭다’고 해서 둑을 쌓고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1940년대에는 40~50그루의 적송(赤松)이
솔숲을 이루었으나 일본군이 모형비행기를 만든다고 베어갔고 1958년 사라호 태풍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없어졌다 한다. 마을 뒷산의
대암봉(臺巖峰·465m) 앞에 있는 큼직한 바위가 ‘생구바우’ 또는 ‘거북바위’라고 하며, 비보림 안쪽에 연못을 만든 것도 바로 거북이
때문이라 한다. 거북바위의 정기가 가묘(家廟)와 보본당(報本堂) 사이로 흘러내린다고 여겨 입향조 이래로 종가 뒤쪽에는 정기가 막힐까
염려하여 집을 짓지 않고 너른 터를 비워두었다. 마을 입구에 있는 큼직한 회화나무는 경주최씨들이 이주하여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심은 것으로 수령이 300~~400년이 된 거목이라 일명 ‘최동집나무’라고 한다.

옻골 연못 사진

옻골 연못

최동집 나무 사진

최동집 나무

최흥원 정려각

최흥원 정려각은 ‘정조 13년(1789년) 백불암 최흥원 선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대구광역시문화재자료
제40호(2006.04.20.)로 지정되었다. 정려각은 마을 입구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나 옻골처럼 마을 중앙에 위치한 예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한말까지도 옻골은 경주최씨종가와
거느린 노비들만 거주하는 독특한 마을이었다. 원인은 6대가
독자로 내려와 자손이 귀했던 탓으로 1910년 경술국치(庚戌
國恥) 이후에 지금과 같은 마을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최흥원 정려 사진

최흥원 정려

소깝담

정려각을 지나 종가를 향해 곧게 뻗은 길 좌우에 소깝(솔가지)를
지붕으로 얹은 오른쪽 담과 기와지붕을 올린 왼쪽 담이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돌과 흙을 섞어 담을
쌓고는 비에 씻겨 담이 훼손되지 않도록 짚이나 소깝으로 지붕을
얹었다. 짚 담은 매년 갈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한번하면 2~
3년 가는 소깝담을 선호했다. 첫해의 소깝담은 붉은 색을 띠지만
묵을수록 잿빛으로 변해간다. 옻골 마을 옛 담장은 ‘흙다짐에
돌을 박은 토석담이 주류를 이루며, 마을 안길 대부분이 직선이라
반듯한 느낌을 준다. 옛 담장은 한옥과 잘 어우러져 전형적인
양반촌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우리 민족의 미적 감각이 담겨 있어
등록문화재 제266호(2006.06.19.)로 지정되었다.

소깝담 사진

소깝담

백불고택

종가의 대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로 맞배지붕을 올린 평대문이다. 전통과 명망이 있는 명문가에서 권위의 상징하는 솟을 대문이
아닌 평대문은 대대로 이어온 겸양의 미덕을 상징한다. 전통한옥은 남성공간인 사랑채와 여성공간인 안채로 구성된다. 사랑채는 중사랑,
큰사랑, 마루로 되어있다. 중사랑은 정면 2칸에 측면 1칸 규모이고, 큰사랑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된 동천서원(東川書院)의
옛 재목을 사용하여 1905년에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중사랑보다 높게 지었다.
사랑채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개념에 따라 원주(圓柱)와 각주(角柱)를 혼용하고, 대청과 방이 접합하는 전퇴(前退)기둥에는 8각주,
대청 우측전면에는 원주, 중간에는 8각주, 후면에는 4각주를 사용하였다. 큰 사랑 북벽에는 ‘수구당(數咎堂)’, 앞에는 중흥조 최흥원
(崔興遠)을 흠모하는 ‘백불고택(百弗古宅)’의 현판이 걸었다. 수구당은 최종응(崔鐘應·1873~1943), 백불고택은 종손의 부친 최병찬
(崔秉瓚)의 글씨이다.
숭모각(崇慕閣)에는 대구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제51호(2003.04.30.)로 지정된 종가소장전적 2종 664점을 보관하고 있다. 종가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문적 이외에도 방대한 량의 문적자료를 소장하고 있어 조선후기 대구지역 양반들의 생활상과 사회, 경제적 이면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랑채 왼쪽으로 돌아가면 안채가 있다. 안채는 북쪽에 육간대청(六間大廳)을 중심으로
‘ㄷ’자 형으로 서쪽에 정지방, 큰방, 정지(부엌), 안대문을, 동쪽에 상방, 고방, 작은방, 중문을 배치하였다.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유교
정신에 따라 북쪽의 대청보다 서쪽과 동쪽의 건물을 낮게 배치한 것이 특색이다.

평대문 사진

평대문

백불고택무 사진

백불고택

별묘 사진

안채

문간채 사진

문간채

가묘(家廟)

집을 지을 때 사당(祠堂)은 정침(正寢)의 동쪽에 먼저 짓는 법도에 따라 살림집 동쪽에 가묘(家廟)와 별묘(別廟), 보본당(報本堂) 등의
제례공간이 두었다. 가묘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1630년 안채와 함께 건립한 것으로 현 종손의 4대조 신위와 불천위(不遷位)
최흥원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경주최씨 종가는 최동집과 최흥원 두 분의 불천위를 모신 집안으로 별묘(別廟)가 하나 더 있다. 별묘는
가묘 동쪽에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로 최흥원이 1737년에 불천위(不遷位) 최동집을 위해 세웠다. 사당 출입문 위에 태극화반(太極花盤)
을 올려놓아 입향조에 대한 권위와 존숭의 관념을 한껏 드높였다.

별묘 사진

별묘

문간채 사진

대암별묘

보본당

보본당(報本堂)은 최흥원이 입향조 최동집의 불천위 제사를 받들기 위해 별묘 앞에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세웠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1~1781)이 1753년에 지은 『보본재기문(報本齋記)』에 ‘십 수 년 뒤 주사(廚舍)와 재실을 차례로 이룩하여’
라는 내용이 있어 이때 보본당 동쪽에 있는 포사도 함께 건립했다. 안채에서 가묘의 제물(祭物)을 준비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별묘의
제물은 반드시 포사에서 특별한 정성을 기우려 마련하고 보본당에서 제사를 받들었다.
보본당(報本堂)은 대구의 대표적인 실학자 최흥원이 66세에, 영조 46년(1770년)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隧錄)』을 간행하라는
왕명에 따라 반계수록을 최초로 교정한 곳으로 유명하다. 어머니 함안조씨(咸安趙氏)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평창이씨(平昌李
氏)를 따라 한성(漢城) 외가(外家)에서 생장했다. 최흥원은 어머니의 진외가였던 유형원(柳馨遠)의 집안과 교류가 있어 일찍부터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연구할 수 있었다.

동계정(東溪亭)

동계정(東溪亭)은 최흥원의 외아들 동계(東溪) 최주진(崔周鎭·1724∼1763)을 기리기 위해 1900년대 초에 후손 최두영(崔斗永)이 훼철된
동천서원의 자재를 사용하여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지었다. 동계정은 옻골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으로 건립 당시에는 후손들의
교육장소로 사용하였으나 현재 전통문화 체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정려각 북쪽에 동천서원(東川書院)을 최흥원을 배향하기 위해
1820년에 건립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82년 훼철되자 수성구 만촌3동 산기슭에 있는 각계재(覺溪齋)로 옮겨 동천서당이라
했다.

보본당 사진

보본당

동계정 사진

동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