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

본문 내용으로 바로가기 메뉴으로 바로가기
턱턱 쌓아 올린 돌담에 무심(無心)한 세월 배이고
첫화면으로 이동 > 민속·문학 > 민속 > 한밤마을(大栗)

한밤마을(大栗)

대청 사진

대청

자연환경

한밤마을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면서 전통신앙과 불교 및 유교문화가 어우러진 팔공산의 대표적인 전통문화마을이다. 한밤마을의
남쪽에는 팔공산 정상에서 가산까지 1000m 내외의 팔공산 주능선이 뻗어있다. 남쪽의 주능선에서 북쪽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고 동쪽
과 서쪽으로 산줄기가 한밤분지를 감싸고 있어 예로부터 냉해와 가뭄, 그리고 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빈번했다.
언제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을까. 마을사람들은, ‘한밤마을 황청리에 청동기시대 무덤인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이 있었으나 과수원이
되면서 사라졌다’며 선사시대에 사람이 살았다고 증언했다. 신라와 고려시대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7세기 무렵에 조성된 불암사
(석굴암)의 모전석탑과 아미타 삼존석불은 한밤마을을 신라의 북방진출의 전진기지였던 흔적이다. 또한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62호로 지정된 한밤마을의 ‘대청(大廳)’은 지휘소 자리로 추정된다. 신라시대에는 화랑(花郞)을 미륵(彌勒)의 화신으로 여겼다.
화랑 김유신(金庾信)을 따르던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했던 예로 볼 때 보물 제988호로 지정된 대율리 석불입상, 즉 미륵불은
한밤마을에 머물면서 팔공산에서 수련하던 화랑들의 정신적인 구심점이자 귀의처였다. 『고려사』에 ‘부계현(缶溪縣)은 현종 9년(1018
년) 상주목에 내속(來屬)하였다가, 뒤에 선주(善州)로 옮겨 소속되었다. 별호(別號)는 부림(缶林)’이란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다.
한밤마을에는 서기 1100년 이전, 고려 중엽에 재상을 지낸 부림홍씨 시조 홍난(洪鸞)이 현재 양산서원 근처의 갖골(枝谷)에 정착하면서
부림홍씨의 본향이 되었고, 1300년 무렵에 신천강씨(信川康氏) 강인석(康仁碩)이 부림홍씨 처가 동네로 이거했다고 전한다. 1392년 여말
선초에 정몽주의 문인으로 문하사인(門下舍人)을 지낸 경재(敬齋) 홍로(洪魯·1366~1392)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이유로 낙향하면서
한밤마을은 동성반촌(同姓班村)으로 발전하여 부림홍씨(缶林洪氏)의 집성촌으로 영천최씨(永川崔氏)와 전주이씨(全州李氏) 등과 함께
어울러 살아왔다.
홍로(洪魯)는 마을의 옛 이름이 ‘대식(大食)’, ‘대야(大夜)’라 했던 것을 ‘대율(大栗)’, 즉 ‘한밤’으로 고쳤다고 한다. 대식(大食)은 한밥,
대야(大夜)는 밤이 길다는 의미의 한밤으로 의미는 같지만 한자를 달리 표기하던 것이 대율(大栗)로 통일되었다.

대청 바닥파임방지돌 사진

대청 바닥파임방지돌

용화사 미륵불 사진

용화사 미륵불

대청 사진1

대청

대청 사진2

대청

성안 숲

한밤마을 입구에는 자연석 바위에 새긴 수해기념비(水害記念碑)가 풀밭에 서 있다. 기념비에는 1930년 경오년(庚午年) 7월 13일(음 6.18)
오후 3~7시 사이에 팔공산 일대에 내린 집중폭우로 동산계곡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한밤마을은 혹심한 피해를 입었던 가슴 아픈 사연이
마치 뼈에 새긴 것처럼 깊이 쓰여져 있었다.
성안숲은 앞걸(남천)과 뒤걸(서원천)이 합류 지점 위에 팔공산의 지기를 막아 마을의 복을 내보내지 않으려고 수구막이를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비보림(裨補林)으로 한밤마을의 성역이자 주민들의 정신적 근거지이다. 진동단(鎭洞壇)은 동신제를 지내는 장소로 ‘지기를
제압하는 뜻’이 담겨있다. 진동단은 예전에는 ‘비신’ 또는 ‘비신대’라고 하여 돌무더기 위에 팔공산에서 정결한 나무를 베어 오리를 조각한
솟대로 매 3년마다 비신을 새로 세웠으나, 시대가 변하자 비신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하여 팔공산에서 나온 돌을 다듬어 지금의 진동단
(鎭洞壇)을 세웠다.
한밤마을은 배 형국을 하고 있어 배가 가라앉는다고 하여 샘을 함부로 파지 않았다고 하며, 진동단은 배의 돛대를 상징한다고 한다.
성안 숲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300명을 일으켜 영천성 수복에 선봉장으로 활약했던 송강(松岡) 홍천뢰(洪天賚) 장군의 추모비
(追慕碑)와 군위지역 정대장으로 홍천뢰(洪天賚)과 함께 출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던 혼암(混庵) 홍경승(洪慶承) 장군의 기적비(紀蹟碑)
가 나란히 서 있다. 1973년 5월에 건립된 홍천뢰(洪天賚) 장군 추모비(追慕碑)의 전면글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이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삼층석탑 1기가 동산2리 신리에서 출토되어 대율초등학교 앞 성안 숲에 옮겨놓았으나 1989년 6월 7일 심야에 도난당해 현재 석탑
의 1층 기단부만 남아있다.

성안 숲 사진

성안 숲

한밤마을 돌담길

한밤마을 안길은 승용차가 비켜갈 만큼 널찍하다. 옛날에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심었다는 엄나무 두 그루가 돌담 옆에서 날카로운 가시를
드러낸 채 대문을 지키고 있다. 보물 제988호 대율리 석불입상을 둘러보고 ‘정겨운 옛 돌담’과 ‘부림홍씨종택’을 알리는 안내표지판을 따라
가면 경운기가 겨우 다닐 정도로 길은 좁아진다. 큰길가의 돌담은 반듯하지만 이곳의 돌담은 구불구불하다. 옛 사람들은 반듯하게 쌓을 줄
몰랐을까. 오랜 경험으로 돌담은 S자로 구불구불하게 쌓아야 튼튼하고 오래간다는 것을 알았고, 덤으로 돌담의 아름다움이 따라왔다.
‘한밤돌담 옛길’ 안내판이 있는 골목은 소가 겨우 다닐 정도로 협소하나 돌담 위로 녹색 카펫 같은 이끼가 덮였고 싱싱한 돌나물이 침샘을
자극한다. 한줌의 흙이 금보다 더 귀했던 시절, 흔해빠진 돌을 치워 한 뼘이라도 마당과 텃밭을 넓히고자 턱턱 쌓아 만든 돌담에는 인고의
세월이 무심(無心)하게 배어있다. 얼마나 돌이 넌더리났으면 육지의 제주도라 했을까.

한밤마을 돌담길 사진

한밤마을 돌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