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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턱 쌓아 올린 돌담에 무심(無心)한 세월 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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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상엿집(하양 무학산)

경산 상엿집 사진

경산 상엿집

상례문화의 변화

관례(冠禮)·혼례(婚禮), 상례(喪禮), 제례(祭禮)의 사례(四禮)는 한국 예법의 대종(大宗)이다. 조선 후기 도암(陶菴) 이재(李縡ㆍ1680~
1746)가 주자가례(朱子家禮)의 허점을 보완하고자 여러 학설을 참고하여 당시의 실정에 맞게 편술한 『사례편람(四禮便覽)』은 우리나라
예학발전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사례(四禮)는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영향으로 쇠퇴하여 관례와 혼례는 ‘성인식’과
‘전통혼례’라는 이름으로 겨우 명맥을 잇고 있고, 제례는 점차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중에서 상례는 그 절차와 형식이 대폭
간소화되어 상여(喪輿) 또한 영구차(靈柩車)로 대체되면서 상여를 보관하던 상엿집은 흉물로 인식되어 흔적 없이 사라졌다.

상엿집

국가민속문화재 제266호(2010.08.30.)로 지정된 『경산 상엿집과 관련문서』는 원래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1533번지에 있었으
나, 자천리 주민들이 마을 공동소유의 상엿집 철거를 결정한 것을 우연히 알게 된 조원경[(사)나라얼연구소 이사장]이 구입하여 2009년 3
월 15일, 경산시 하양읍 대학리 산 144-35번지 무학산 자락으로 옮겨 온 것이다.
상엿집의 종도리 장혀 하부에 ‘上之二十八年辛卯二月十九日巳時立柱二十五日五時 上樑’이라 적혀 있어 고종 28년(1891년) 신묘년(辛卯
年)에 건립한 것으로 자천리 어른들의 말로는 ‘상엿집을 오래된 목재를 사용하여 지은 것’이라는 말을 어른들로부터 들은 바 있다고 한다.
경산 상엿집은 화북면 자천리에서 기와만 벗기고 나머지는 트레일러에 그대로 싣고 와서 복원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벽채는 판벽과 판문, 살창으로 되어 있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건물내부는 상여 보관과 부속품을 넣어두는 2개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경산 상엿집은 ‘고종 28년(1891년)’에 건립한 것으로 건물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다. 대체로 상엿집은 흙벽과
평지바닥, 또는 판벽과 평지바닥인 것과 달리 경산 상엿집은 3칸 규모의 판벽과 우물마루로 되어 있고, 특히 현재 알려진 상엿집 가운데
유일하게 누(樓)마루라는 점에서 건축학적 가치가 있다.

상엿집 고문서

고문서는 자천리 상엿집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상여 및 부재 등과
함께 상여문서(喪輿文書) 5종과 동중문서(洞中文書) 6종 등 모두
11종이 수습되었다.
5종의 상여문서는 1891년 중수 이건 전후시기의 상여계(喪輿契)
운영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모습을 전해주고 있으며, 6종의 동중
문서는 촌락 사회경제와 관련된 것으로 부세관련 청원서, 농악의
걸립(乞粒), 공동납 관련기록 등의 마을조직과 관련된 문서로
상여문서와 연계가 있다.

경산 상엿집 고문서 사진

경산 상엿집 고문서

상엿집과 고문서의 가치

상례(喪禮)에서 상여(喪輿)는 사자를 운구하는 수단이다. 전통적으로 상엿집은 각 마을에서는 이곳에 상여를 보관 및 관리하고, 초상을
당하면 상여로 사자를 운구하기 위하여 계를 만들어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대표적인 지역공동체 문화의 구심점이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66호 『경산 상엿집과 관련문서』는 상엿집과 상여, 그리고 마을문서를 포함한 상여와 관련된 문서 등이 함께 있어 상엿집이나 상여만
있는 다른 문화재와는 달리 전통사회 상례문화를 종합적으로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생활유산으로 평가되며 학술적인 의미가 크다.

설화리상여 사진

설화리상여

상여 사진1

상여

상여 사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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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 사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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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 사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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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 사진5

상여

설화리상여소리 사진1

설화리상여소리

설화리상여소리 사진2

설화리상여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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