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

본문 내용으로 바로가기 메뉴으로 바로가기
턱턱 쌓아 올린 돌담에 무심(無心)한 세월 배이고
첫화면으로 이동 > 민속·문학 > 민속 > 불로동 고분군(大邱不老洞古墳群)

불로동 고분군(大邱不老洞古墳群)

불로동 고분군 사진

불로동 고분군

불로동 고분군

대구 동구 불로동 335번지에 있는 『대구 불로동 고분군(大邱不老洞古墳群)』은 사적 제262호(1978.06.23.)으로 312,239㎡의 면적에
200여기 이상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불로동 고분군은 팔공산의 동쪽에 자리한 환성산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문암산의 남서쪽 언덕에
있으며, 남쪽과 서쪽에는 불로천과 금호강이 흐르고 있다. 1938년 일제강점기에 해안면고분이란 이름으로 조사된 대형봉토분 2기는 깬
돌(割石) 또는 냇 돌(川石)과 판돌(板石)을 섞어 쌓은 돌덧널무덤(石槨墓)으로 토기, 마구류를 비롯한 각종 유물이 출토되었다.
2001년 경북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한 91호·93호 고분은 세장방형의 돌덧널무덤으로 토도류(土陶類) 360점, 장신규류 및 금속류가 187점
등 모두 547점이 출토되었고, 딸린덧널(副槨)의 항아리 안에서 상어뼈와 생선뼈가 확인되었다. 조성 시기는 출토유물로 보아 5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봉무·불로동 유적

대구지역의 철기문화는 기원전 2~1세기경에 보급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철기문화 유적은 복현동, 팔달동, 대명동, 불로동, 봉무동,
두산동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달성토성과 검단토성, 봉무토성 등은 이 시기에 축조되었다. 대구 봉무동유적은 도로유구 외에 주거지 등의
생활유구와 용해로 등의 제철유구와 탄요(炭窯), 토기요 등의 생산유구, 그리고 대규모 고분이 함께 조성되어 있는 복합유적이다. 당시
봉무·불로동 집단은 초기철기-원삼국시대 대구와 경산지역의 두 정치체제 사이에 지리적 이점을 살려 완충적 역할을 하면서 정치ㆍ경제적
독자성을 유지하는 한편, 주변지역과 교류관계를 지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봉무동ㆍ불로동고분군의 출토유물에서 강한 소지역성이 보이
고 경산지역보다 금호강 북안의 고분군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진한과 변한의 소국 대부분이 낙동강 유역에 있어 당시 독립적인 소별읍이었던 불로·봉무동집단은 낙동강과 연결된 금호강을 통해 다른
지역과 교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4세기 이후 이곳을 통합한 신라는 5~6세기 무렵, 불로·봉무동에 도로구축과 대규모 굴립주건물지 등의
창고시설을 건립하고 금호강과 낙동강 수상교통의 거점으로 삼아 보은, 문경, 영월 등의 북진거점에 물자를 공급하였고, 통일 후에는 각
지역의 물자가 이곳에 모여 육로를 통해 경주로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재조대장경이 1398년(태조 7) 5월에 강화도에서 한강과 낙동강 수운을 이용하여 고령을 거쳐 합천 해인사로 이운했던 예로 보건대,
초조대장경 또한 개경에서 예성강과 한강, 그리고 낙동강과 금호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이곳을 통해 부인사로 이운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