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

본문 내용으로 바로가기 메뉴으로 바로가기
턱턱 쌓아 올린 돌담에 무심(無心)한 세월 배이고
첫화면으로 이동 > 민속·문학 > 민속 > 팔공산 인종태실과 광해군 태실

팔공산 인종태실과 광해군 태실

인종대왕 태실봉 사진

인종대왕 태실봉

인종태실

예로부터 팔공산은 나라의 명산이자 길지(吉地)로 조선 제12대 인종(仁宗·재위 1544~1545)과 제15대 광해군(光海君ㆍ재위 1608~1623)
의 태실(胎室)을 팔공산에 조성했다. 연산군을 반정으로 몰아내고 즉위한 중종은 재위 10년(1515년) 만에 그토록 고대하던 원자(元子·훗
날인종)를 얻었지만, 그 기쁨도 잠시, 장경왕후가 원자를 낳은 지 7일 만에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경왕후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
고 원자만은 오래살기를 간절하게 바라며 이름을 ‘억명(億命)’으로 지어달라고 지아비 중종에게 남긴 편지가 중종실록에 전한다.
중종은 장경왕후의 간절한 바람에 따라 태(胎)를 잘 갈무리 하여 원자의 명을 길게 하고자 나라의 명당 가운데 길지(吉地)를 찾아 팔공산
은해사 백흥암 뒷산 봉우리(462m)에 태실(胎室)을 조성하고 안태하니 이로부터 태실봉(胎室峰)이라 했다. 중종 24년(1529년) ‘인종태실
이 실화로 주변 수백 보가 불탄 책임을 물어 영천군수 허증을 체직했다’는 기사로 볼 때 태실수호가 산릉(山陵) 수호와 같이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은해사사적비문(銀海寺事蹟碑文)』에는 ‘조선 인종 1년(1545년)에 대화재로 7대 보물과 사찰 전소되어 명종 1년(1546년)에 천교화상
(天敎和尙)이 해안평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짓고 은해사라 했다’고 하나 인종실록에는 인종 원년에 태실과 태찰(胎刹)이 불탔다는 기록이
없어 중종 24년(1529년)에 태실의 실화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중종 30년(1535년)에 ‘왕세자 태실의 비석에서 글자 4자를 깨뜨려 훼
손’한 사건이 일어나자, 중종은 이를 왕권에 대한 반역으로 보고 경차관을 보내지 말고 의금부의 낭관을 보내 죄인을 잡아다 추문하라는
엄한 영을 내린다.
인종이 즉위 1년이 채 못 되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한 명종은 인종태실을 역대 어느 임금의 태실보다 규모를 크게 하고 석조물
장식을 화려하게 조성하여 후덕한 군주임을 드러낸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50호(2004.06.28.)로 지정된 인종태실이 자리한 태실봉
(462m)은 팔공산에서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마치 동쪽에서 서쪽으로 키(箕)를 엎어 놓은 것처럼 봉긋하지만 정상부는 넓고 평평하다.

가봉비(加封碑)는 거북모양의 귀롱대(龜籠臺)에 ‘인종대왕태실(仁宗大王胎室)’이라 새긴 비신을 세우고 두 마리 용을 새긴 이수를 올렸다.
귀롱대와 이수는 화강암이나 비신은 하얀 대리석인 점이 특이하다. 연꽃잎을 둘레에 조각한 지대석 위에 태항아리를 안장하는 중동석
(中童石)을 세웠다. 중동석을 중심으로 마름모 모양으로 화강암을 길게 다듬어 바닥을 빈틈없이 고르고 그 가장자리에는 팔각의 난간석을
둘렀다. 인종태실은 중종 16년(1521년)에 조성되었고, 인종이 붕어하자 명종 1년(1546년)에 가봉(加封) 공사와 숙종 37년(1711년)에는
수개(修改)가 있었다. 1928년에 일제가 전국에 흩어져 있는 태실의 관리가 어렵다는 명목을 내세워 54기의 태실을 경기도 서삼릉으로
이봉할 때 인종태실의 태호(胎壺)와 지석(誌石) 등이 서삼릉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크게 훼손되었다. 1999년 발굴조사에 이어 2007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인종대왕 태실 사진1

인종대왕 태실

인종대왕 태실 사진2

인종대왕 태실

광해군 태실

도덕산(660m)에서 함지산(288m)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에서 대구시 북구 연경동으로 갈라진 능선이 봉긋하게 솟은 태봉(116.7m)에 조선
제15대 임금 광해군(光海君·재위 1608~1623)의 태실이 있다.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아들로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중에 왕세자가
되었고 1608년에 즉위했다. 광해군 3년(1611년)에 ‘대구부사 안도(安燾)가 수토관(守土官)으로서 태봉(胎封)을 수개(修改)했다’는 실록의
기사로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 태실을 가봉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 태실 앞에 있었던 태봉마을은 연경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으나
한국토지주택공사의 ‘대구연경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사라졌고, 다만 대구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수령 1,000년의 느티나무와 300년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남아있다. 태봉마을에서는 태봉을 ‘탯등’이라 하고 봉우리의 형상이 연꽃을 닮아 ‘연화봉(蓮花峰)’이라 불렀다고 한다.
광해군 태실은 인종태실과 달리 귀부(龜趺)는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산산조각이 나있고, 여타 석물들도 크게 훼손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있다. 현재 남아있는 태실비에는 ‘왕자경용아지씨태실(王子慶龍阿只氏胎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곳이 왕자의 태실임을
밝히고 있다. ‘아지(阿只)’의 실제의미는 ‘아기’이다. 아기란 아이와 애의 높임말로 특히 궁중에서는 대군아기씨, 공주아기씨 등과 같이
두루 쓰였다. 건립연대는 비석의 파편에 ‘만력(萬曆) 삼(三)○○ 일월(一月) ○일(日) 건(建)’이란 명문이 있어 명나라 신종 3년(1575년),
즉 선조 8년(1575년)에 태어난 광해군의 태실로 밝혀졌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묘호(廟號)가 없다. 일설에 일제강점기에 태실의 부장품을 노린 도굴꾼이 파괴했다고 하나, 도굴꾼들이
귀부와 석물을 산산조각을 내면서 도굴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추정컨대 인목대비 유폐와 형 임해대군과 동생 영창대군의 살해,
후금(청)과 화친 등의 죄목으로 광해군이 폐위된 뒤에 반대세력에 의해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광해군 태실 사진

광해군 태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