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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턱 쌓아 올린 돌담에 무심(無心)한 세월 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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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봉산 마치나무와 그 주변의 전설

대구시 북구 동변동 속칭 무태(無怠)의 동북쪽 산을 가남봉(柯南峰) 혹은 갈봉산(葛峰山)이라 한다. 이 산은 원래 갈근(葛根)이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 맞은편의 서변동(西邊洞) 뒷산을 일러 망실봉(忘失峰) 혹은 망실산(忘失山)이라고 하는데, 이 산은 무태
(無怠)에서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산록이 순하고 부드러우므로 자연도취에서 근심을 잊을 수 있는 산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 두 산 사이에 흐르고 있는 강이 바로 동화천(桐華川) 혹은 문암천(門岩川)이라고도 하는데, 동화사(桐華寺)에서 흘러오는 강이라서
동화천(桐華川)이라 하고, 미대와 지묘1동 사이의 협곡(峽谷·지금의 공산댐 자리이다)이 문(門)처럼 생겼다 하여 문바위 혹은 문바우라
하였고, 한자로 문암(門岩)이라 표기하여 문암(門岩)을 거쳐 흘러오고 있는 강이란 데서 문암천(門岩川)이라고 부른다. 이 강을 사이에
두고 동서변동과 연경동을 속칭 무태(無怠)라 한다.
옛날 왕건이 견훤의 군사를 치러 갈 때 이곳을 지나면서 견훤의 군사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곳이니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했다는
데서 무태(無怠)란 속명이 붙어지게 되었다 한다. 이곳은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서 ‘일무이파(一無二巴)’라 칭찬했듯이 대구
근교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은 무태(無怠)이고, 그 다음이 파동(巴洞)」이란 말로 이곳은 산자수명(山紫水明)하여 자연의 경관이 뛰어나고
인재(人才)의 고장이라 한다.
갈봉산(葛峰山) 서남쪽 마을, 즉 지묘3구를 서원(書院)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곳은 옛날 퇴계선생(退溪先生)의 문하생들이 서원을 세워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대원군(大院君) 때에 서원철폐령에 헐려 지금은 그 자취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곳 무태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마치나무 전설’이란 것이 있다. 동변동 뒷산 마을에 갈근(葛根)이 많다는 갈봉산(葛峰山)
꼭대기에는 지금부터 4~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웅장하게 버티고 섰던 나무가 있었는데, 동변동 마을의 아이들이 달불놀이를 하다가
산불로 인하여 타버리고 지금은 그루터기만 남아서 옛날의 거대한 고목의 존재를 짐작할 뿐이다.

지금부터 수백 년 전인 임진왜란 당시에 김덕령(金德齡) 장군이 함지산에서 내려오자 창포덤(속칭 造山峰) 왼쪽 골짜기에 있는 말샘
(감덕령 장군을 위해서 말이 솟아났다고 붙여진 이름)에서 준마 한필이 나왔다. 김덕령 장군이 그 말을 타고 아랫마을(서변1구 동사무소
남편의 마을) 앞들에서 달리면서 흘린 채찍이 아랫마을 앞들 가운데에 당제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덕령 장군은 갈봉산(葛峰山)으로 달려 그 산꼭대기에 이르렀는데 이곳에 와서 말채찍을 거꾸로 꼽아두면서 이 나무가 살면 내가
산줄 알고, 이 나무가 죽으면 내가 죽은 줄로 알라고 하면서 서북쪽 2㎞ 지점인 연경동 뒷산으로 준마를 타고 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연경동 뒷산 큰 바위에는 지금도 김덕령 장군이 탔던 말발굽 모양이 바위에 새겨져 전하고 있다. 그리고 갈봉산(葛峰山) 꼭대기에
는 김덕령 장군이 거꾸로 심은 말채찍이 최근까지도 무성하게 자라 무태의 동ㆍ서변 마을을 지켜주고 있었으며, 그 나무를 말채찍나무,
곧 말채나무라고 부르다가 음운생략 현상으로 ‘마치나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그 나무가 얼마나 무성하던지 그 둥치가 장정 수십 명이 안아도 모자랄 정도의 큰 나무였으나 산불로 인하여 애석하게도 타버렸으니 이제
김덕령 장군이 불에 타버렸다고나 할까?
또한 옛날 그 나무 밑에는 깊은 샘이 있었는데, 그 깊이를 측정하려고 명주실타래에다 돌멩이를 매어 내려 보았으나 끝을 측정할 수가 없
을 만큼 깊었다고 한다. 지금은 샘의 흔적과 나무그루터기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출전 : 팔공산사적조사보고서. 1987.02.25. 대구직할시·경북대학교]
[제보자:북구 서변동 171번지. 김성조, 남, 82세, 채록일자;1980. 12. 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