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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턱 쌓아 올린 돌담에 무심(無心)한 세월 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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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성사(環城寺)의 내력(來歷)

환성사 거북바위 사진

환성사 거북바위

경산군 하양읍 사기리 환성사(環城寺)는 신라시대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세운 큰 절이었다. 심지왕사(心地王師)께서 입적한 이후에도
절이 날로 번창하여 절에는 항상 수백 명의 사람들이 드나들어 잠시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밥을
해 먹이려니 거기에 소모되는 곡식과 반찬의 양도 엄청났다. 콩나물로 반찬을 하려면 보통 시루로는 감당할 수 없어서 둘레가 수십 자나
되는 돌시루를 만들어 콩나물을 키워 먹이기도 했다고 한다. 자세히 전하지는 않으나, 고려 때 이 절에서 또 한 번 위대한 선사(禪師)가
나타나니 이를 기념하여 큰 일주문을 세우고, 절 입구에는 큰 연못을 팠다. 연못에 달이 비치는 광경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이를 보고자 절
앞에 큰 누각을 짓고 ‘수월관(水月觀)’이라 했다.

이 선사(禪師)가 예언하기를, ‘만일 이 연못을 메우면 이 절의 불기(佛氣)가 쇠하리라’고 하매, 역대 주지 스님들이 이 연못을 소중히
관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수백 년이 지나니 이 얘기를 아는 사람이 적어지고 전설처럼 희미한 기억 속에만 남게 되었다.
또 이 절 입구에 큰 자라바위가 있었는데 그 모양이 자라와 너무나 닮아서 붙인 이름이었다고 한다. 심지왕사(心地王師)께서 이곳에
절터를 잡을 때 이 바위를 보고서, ‘이 바위가 있는 한 이 절의 번영이 쇠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는 얘기 있으나 이 역시 희미한 기억
속의 전설이 되었다.
때는 조선 초, 나라에서 불교를 심하게 억압했으나 이 환성사(環城寺) 만은 일반 서민(庶民)에서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아녀자에 이르기
까지 시주와 내왕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주지(住持)가 된 한 스님이 있었는데 큰 덕(德)으로 불자(佛者)들의 숭앙을 받았으나
늙어서는 게으름이 늘어 손님이 많은 것을 귀찮게 여겼다. 그래서 혼자서 생각하기를, ‘우리 절에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것은 틀림없이
자라바위 때문일 것이다’하고 사람을 시켜 그 자라바위의 목을 자르게 하였다. 자라바위의 목을 정으로 깨뜨리니 갑자기 연못의 물이 붉게
변하여 이것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절이 오히려 더 소란스러워 졌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거지 행색을 한 객승(客僧)이 찾아와 묵고 가기를 청하니 주지스님은 이를 귀찮아해서 구석진 골방을 주고 음식대접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튿날 그 스님이 절을 떠나면서, ‘이 절에 사람이 많은 것은 저 연못 때문이니 저것을 메우시오’라고 말했다.
주지스님은 이 말을 듣고 동네사람들을 불러다가 연못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흙을 한 삽 퍼붓자, 갑자기 연못 속에서 금송아지가
한 마리 날아오르더니 슬피 울고는 산 너머 동화사 쪽으로 가버렸다고 한다. 동네사람들이 겁을 먹고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자 주지 스님
은 절의 스님들을 동원해 메우게 하였다. 꼬박 백일이 걸려 못을 메우고 마지막 한 삽 흙을 퍼붓자 갑자기 온 절에 불이 붙기 시작하여 그
웅장하던 전각들을 모조리 태우고 말았다고 한다. 겨우 대웅전과 수월관만 남았으나 이후로 그 절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출전 : 팔공산사적조사보고서. 1987.02.25. 대구직할시·경북대학교]
[제보자:경산군 하양읍 사기동, 이 무량심(보살), 여, 62세, 채록일자;1986.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