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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턱 쌓아 올린 돌담에 무심(無心)한 세월 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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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발고개, 왕산, 파군재에 얽힌 전설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 후백제의 침입으로 신라가 위기에 처하자, 신라의 원병 요청으로 고려 태조 왕건은 팔공산에서 후백제와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왕건은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 대구시 북구 서변동을 지나 연경동, 지묘3동 방향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서변동 일대를 지날
때 왕건이 군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라(無怠)’고 당부했다고 해서 지금도 이 지방은 속칭(俗稱) ‘무태(無怠)’라고 불리고 있다.
그리고 연경동 부근에 이르렀을 때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와 왕건이 감탄한 마을이라 해서 ‘연경(硏經)’이라 불린다고
한다.

진군을 계속하면서 지금의 지묘3동에서 지묘1동으로 가는 고개에서 적진을 향해 진군의 나팔을 불었다. 이로 인해 이 고개를 ‘나발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견훤의 군사가 왕건의 군사를 둘러싸고 쳐들어가면서 나팔을 불렀다 해서 나팔고개라고도 하고,
왕건의 군사를 깨뜨린 견훤의 군사가 이 고개를 넘으며 나팔을 불었다고도 한다.
이 나발고개를 넘어간 고려군은 드디어 후백제의 견훤 군사와 일전을 불사하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고려군은 견훤의 군사에게 무참히
짓밟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이때 고려충신(高麗忠臣) 신숭겸(申崇謙)이 왕건을 살리기 위해 곤룡포를 입고 왕건의 모습과 비슷하게
꾸며 적군의 눈을 속였다. 이 틈을 타서 왕건은 지묘 1동 북쪽에 있는 산으로 무사히 피신을 해 화를 면했다. 이런 연유로 이 산이 왕건을
살렸다는 뜻에서 ‘왕산’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왕을 보낸 고려군은 신숭겸을 중심으로 끝까지 항거를 계속했다. 지묘 2동에서 파계사로 넘어가는 뒷산을 뚫고 위장전술을 폈으나
사기충천한 견훤 군사에게는 역부족이었으며, 많은 군사가 쓰러지고 이리저리 흩어져 버렸다. 간신히 남은 몇몇 군사를 수습하여 오른 쪽
동화사 고갯길로 활로를 개척했으나 숨어있던 적의 군사에게 비참한 희생을 겪고 지묘 앞 냇물을 간신히 건넜다. 왕산을 배후에 두고
최후의 싸움을 벌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진퇴유곡(進退維谷)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견훤의 군사들은 발바닥에 사마귀가 있는 왕건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기에 신숭겸은 팔공산 어느 자락에 숨어 있을 왕건이
잡힐까 두려워 자기 발바닥에 상처를 내고 먹물로 검은 점을 만들었다. 장군과 더불어 마지막 남은 고려군사는 견훤의 칼날 아래 쓰러져
팔공산 누리를 붉게 물들여 그 당시의 처참한 광경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신숭겸의 군사가 제1차로 패해서 흩어진 곳을 ‘아랫파군재’라 하고, 제2차로 패한 곳은 ‘윗파군재’라 불리고 있어 지금도
이곳을 지나가는 이로 하여금 발길을 멈추게 한다.

[출전 : 팔공산사적조사보고서. 1987.02.25. 대구직할시·경북대학교]
[제보자:대구직할시 동구 지묘3동 1195번지. 박성서. 남, 76세, 농업, 채록일자;1986.10.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