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

본문 내용으로 바로가기 메뉴으로 바로가기
턱턱 쌓아 올린 돌담에 무심(無心)한 세월 배이고
첫화면으로 이동 > 민속·문학 > 구비문학 > 지묘(智妙) 일대의 지명 전설

지묘(智妙) 일대의 지명 전설

대구시 동구 지묘동에 있는 표충단, 충렬비, 표충재를 합쳐 대구시 지방문화재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이전에는 달성군으로 경상북도
문화재 제14호였는데 대구시로 승격되고 난 뒤에 제1호가 된 것이다.

이 자리는 장절공 신숭겸 장군이 전사한 곳이다. 지금부터 천여 년 전, 서기 917년 태봉에서는 폭군 궁예를 내몰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
하였다. 그때 신숭겸, 김낙, 배현경, 복지겸 네 사람이 왕건을 고려 태조로 모시게 되었다. 그 뒤 10년 후 신라 경애왕 3년, 포석정에서
견훤의 기습을 받아 신라는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되어 고려에 원군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고려는 기병 5천을 신라에 보냈다. 최초의
접전은 잘 알 수 없으나 견훤의 군사는 연전연승(連戰連勝), 기세가 등등, 승승장구하고 고려군은 연전연패(連戰連敗)하다가 최후로
포위된 곳이 지금의 지묘 1구 이 자리라 한다. 이리하여 왕을 구하기 위하여 지묘에서 구출작전이 벌어졌다. 전 군사가 전몰(戰歿)하는
일이 있어도 왕을 살려야 했는데 그 방법이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용케도 왕건과 신숭겸 장군의 얼굴이 흡사하여 거기서 신장군은 태조
왕건의 옷으로 갈아입고 왕으로 가장하여 김낙 장군과 더불어 진두지휘하였다. 왕을 평복으로 갈아입혀 숲에 숨기고 동으로, 서로 왔다
갔다 하며 적의 시선을 끌고 왕을 그새에 탈출시키는데 성공했다.
신숭겸 장군은 그곳에서 전사하였고 견훤의 군사는 나팔을 불고 기뻐하였다. 그들은 신숭겸 장군을 왕으로 생각하고 머리를 잘라갔으며
지금도 그 머리는 어디에 있는지 잘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그 뒤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고려에서 시신을 거두려고 와 보니 머리는 없고
옷도 벗겨져 분별하기가 힘이 들었다. 『장절공유사』에 보면, ‘유금필 장군이 신 장군을 잘 알아 좌족하(左足下)에 칠성(七星)이 있으니
그것을 보면 찾을 것이다’ 하여 그 말을 믿고 지금 봉분자리에서 시신을 찾아 지금의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독리에 묘소를 세우고 장례를
치렀다. 왕건이 이를 추모하기 위하여 그 자리에 지묘사(智妙寺), 미리사(美理寺), 대비사(大悲寺)를 그 근처에 지었다.

대비사(大悲寺)는 동구 평광동(이것은 행정명이며 실제 마을 이름은 실왕(失王;시랭이) 또는 일명 대비동이라고도 한다.)에 영정을
모시고 명복을 빌었다. 대비사(大悲寺)는 불탄 기록이 있으나 미리사와 지묘사는 불탄 기록이 없다. 아마 몽고란때 부인사가 불탈 때 근처
절이 전부 불탔다는 기록이 있어 같이 불탔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대비사(大悲寺)는 김천득이란 자가 선고(先考)의 묘를 쓰기 위해
중과 짜고 불을 질러서 영정이 없어졌다.
150년 전 무자년(戊子年;1828년)에 송축 기록이 있는데 그 후 자손이 다시 찾아와 비각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묘사가 불타
고 지묘(智妙)는 황폐해졌는데 300년 전 유영순이라는 분이 이 자리에 와 보시 너무나 흔적도 없이 변해버려 인근 사람들의 힘을 모아 표
충사(表忠祠)라는 사당을 짓고 충렬비를 세웠다고 한다.
표충사(表忠祠)는 김낙, 신숭겸 두 분을 모시는데, 그 신길원 장군을 모셔 내려오다가 서원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대원군 때 서원 철폐의
국가령에 따라 지묘(智妙)의 표충사(表忠祠)가 헐리게 되었다. 지금의 표충재는 서원을 없애고 다시 재실을 짓고 후손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파군재는 ‘견훤의 군사가 신숭겸, 김낙 등 고려 군사를 깨뜨렸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한편으로는 견훤의 군사가 여기서
진을 거두었다는 데서 파군이란 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그러니 고려군사가 전멸당한 뒤 후백제군이 작전을 그만두고 군을 거두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고려군은 전멸했으므로 파군한데서 나온 말이다. 이에 앞서 왕건의 군사가 지금의 무태(無怠) 잠수교가 있는 금호강을
건너 팔공산 기슭까지 왔으므로 견훤의 군사가 나타날 것을 염려하여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데서 무태(無怠)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나팔고개라는 것은 전쟁 때 나팔을 불었다는데서 연유했는데, 지묘(智妙)를 중심으로 포위한 견훤의 군사들이 포위망을 압축
시키기 위해 나팔을 분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역시 견훤의 군사들이 나팔을 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왕건의 군사가
무태(無怠)로부터 6㎞를 긴장하면서 행군하다가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나팔을 불었기 때문에 나발고개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독좌암(獨坐巖)은 ‘독지바우’라고도 하는데 대구유형문화재 제8호(1984.07.25.) 봉무정(鳳舞亭) 앞 개울가 비탈에 있다. 이는 태조 왕건이
지묘에서 참패를 당하고 왕산(王山)으로 달아나서 팔공산(八公山)의 염불암 옆 일인석(一人石)에 앉았다가 다시 파군재를 넘어 봉무동
지금의 독좌암(獨坐巖)이란 바위에 앉았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그 너머 불로동 마을 앞을 해안(解顔)이라 하는데 이를 동촌면이라 하기 전에 해안면이라 했다. 태조가 패잔병을 끌고 들판을 지나면서
몹시 걱정했는데 마침내 무사히 통과하여 얼굴의 수심이 가셔서 얼굴을 펼 수 있었다는 뜻에서 해안(解顔)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지묘 1구 뒷산인 왕산(王山)은 왕건이 올라가서 능선을 타고 3번 만에 뛰어 피신한 곳이다. 그래서 왕건을 죽을 것을 이 산 때문에 살았다
하여 왕산(王山)이라 했다고 한다. 그 뒤로 간 곳이 동화사 염불암이다. 여기는 일인석(一人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왕건이 거기 숨어
앉아 있으니 수도하던 도승이 첫눈에 왕건인줄 알고 그의 자백을 받기 위해 넌지시 묻기를, ‘이 자리는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곳인데
그대는 누구인가, 내려오라’고 했더니 ‘내가 바로 왕(王)이다’라고 자백했다. 그러자 도승이 절을 하고 길을 안내해 주었다. 그 후 염불암
옆의 그 바위를 왕건이 혼자 앉았다 하여 ‘일인석(一人石)’이라 부른다고 전한다.
지금의 지묘 1구 앞들을 ‘탑들’이라 하는데 이는 옛날 지묘사(智妙寺)의 탑이 있던 곳이라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지금은 탑이 없어졌다.>
경지 정리할 때 그곳을 파니 부엌의 재와 검정이 나오고 기와조각이 나왔고 요즘도 가끔 나오고 있다. 그리고 왕건은 지묘 1구 뒷산인
왕산(王山)으로 달아나 동화사 뒤의 염불암의 일인석(一人石)을 거쳐 다시 지금의 봉무정 앞에 있는 큰 바위에 혼자 앉아 쉬었다가 다시
해안(解顔)지방을 거쳐 지금의 반야월(半夜月)에 오니 밤은 반야(半夜;한밤중)이고 달(月)이 떠 있다고 해서 반야월(半夜月)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전한다.

이렇듯 전쟁에서 있었던 일이 전해 내려와 지금의 지명이 된 것이 많다. 대구 근교 주위가 거의 이런 연관으로 이름이 지어졌는데 주위
이름이 산이나 강의 생김새를 보아 이름 지은 것에 비해 이곳은 역사적 일이 있어 이를 토대로 이름이 지어졌다. 지묘사(智妙寺)라는 것도
지묘(智妙), 즉 작전을 펼 때 지혜와 묘책을 써서 왕건을 도망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전한다. 그리고 지금의 지묘동은
옛날 지묘사(智妙寺)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동명(洞名)이라 전한다.
신숭겸의 왼쪽 발바닥에 7개의 점이 있는데 이는 왕건과 같게 하기 위해 바늘땀을 떠서 먹을 넣었다고 전해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태조의
좌족하(左足下)의 흑성이 있었는지는 모르고 정절공의 신신을 거둘 때 머리도 없고 왕복(王服)도 거두어 가고 전혀 알 수 없었는데, 마침
유금필 장군이 신 장군을 잘 알아 신장군의 좌족하(左足下)의 흑성을 찾아낸 것이 단서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표충사를 혈단(血壇)이라 부르는 것은 신장군의 흘린 피를 모아 단을 만들었다는 뜻으로 시체가 묻힌 곳과는 다르다.

[출전 : 팔공산사적조사보고서. 1987.02.25. 대구직할시·경북대학교]
[제보자:대구직할시 동구 지묘동 564번지. 신우용. 남, 52세, 태극도서 주인, 채록일자;1986.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