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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산영악(神山靈岳)에 서풍이 불더니 산의 호흡, 상제(上帝)의 자리에 닿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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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의 역사

팔공산 풍경사진

팔공산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중사오악(中祀五岳)의 하나인 중악(中岳)으로 부악(父岳) 또는 공산(公山)으로 불렸던
우리나라 제일의 신산영악(神山靈岳)이다. 신라, 고려, 조선 초기에도 공산이라 했다. 팔공산이란 명칭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팔공산하불의추(八公山下不宜秋)/ 팔공산 아래는 아직 가을이 아니로다’라는 시구의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다.

팔공산은 신라시대 부악(父岳) 또는 공산(公山)으로 불렸던 우리나라 제일의 신산영악(神山靈岳)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32 잡지(雜志) 제일제사(第一祭祀)에

삼산과 오악, 그리고 명산과 대천으로 나누어 대사, 중사, 소사로 삼았다.[三山五岳已下名山大川, 分爲大中小祀]

는 기사와 『삼국유사(三國遺事)』 감통(感通) 제칠(第七)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에

신라시대에는 오악(五岳)을 두었는데, 동악은 토함산, 남악은 지리산, 서악은 계룡산, 북악은 태백산,
중악은 부악(父岳) 또는 공산(公山)이라 한다. [羅時五岳謂東吐含山南智異山西雞龍北太伯中父岳亦云公山也]

는 기사로 보건대, 팔공산은 중사오악(中祀五岳)의 하나인 중악(中岳)으로 나라의 중심에 위치했던 신라 제일의 명산이었다.
팔공산은 신라와 고려에 이어 조선 초기에도 공산(公山)으로 불렸고 16세기를 전후해서 공산 또는 팔공산(八公山)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지 26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에

공산(公山). 팔공산(八公山)이라고도 일컫는데, 해안현에서 북으로 17리에 있다. 신라 때에 부악(父岳)이라고 일컫고,
중악(中岳)에 비겨 중사(中祀)를 지냈다. 둘러 있는 것은 부 및 하양·신녕·부계(缶溪)·인동·팔거(八莒) 등의 읍이다.
[公山或稱八公山在解顔縣北十七里新羅時稱父岳擬中岳爲中祀環而居者府及河陽新寧缶溪仁同八筥等邑也]

는 기사의 ‘팔공산(八公山)’이 지금까지 최초로 알려졌으나 이보다 앞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ㆍ1431~1492)의 ‘범어역 노상에서
본 것을 기록하다(凡於驛路上記所見)’ 시에 기록된 ‘팔공산’ 시구가 가장 오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