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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장군(八將軍) 순사설(殉死說)

달성군지(達成郡誌) ‘팔장군 순사설’ 사진

달성군지(達成郡誌) ‘팔장군 순사설’

일본강점기인 1930년에 간행한 『달성군지(達成郡誌)』 산천형승조(山川形勝條)에

팔공산을 옛날에는 동수산(桐藪山)이라 했다. 신라 말에 견훤이 경주를
공격하자 고려 태조가 정병 오천을 이끌고 구원하러 나섰다 . 견훤을
동수산(桐藪山) 아래에서 만나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포위되어
심(甚)이 위급한 상황에 처했다. 이때 대장군 신숭겸이 대신 왕의 수레를
타고 출전하여 죽었다. 태조는 이 틈을 타서 겨우 몸을 피하였다.
지금 염불암 뒤에 있는 바위를 일인석(一人石)이라고 부르는데 태조가
피적(避賊)하는 중에 잠시 앉아 쉬었던 곳이다. 이때 신숭겸(申崇謙)ㆍ
김낙(金樂)ㆍ김이갑(金以甲)ㆍ전이갑(全義甲) 등(等) 팔인(八人)이 함께
순사(殉死)하였다 하여 팔공산(八公山)이라 했다.
[八公山古稱桐藪山羅末甄萱攻慶州高麗太祖自將精兵五千往救之遇甄萱桐
藪山下戰不利被圍甚急大將軍申崇謙代乘王車出戰死之太祖僅以身免今念佛
庵後有號一人石卽太祖避賊時坐處也時申崇謙金樂金以甲全義甲等八人幷殉
死稱八公山云]

라는 기사가 있다.

‘동수대전에서 팔장군이 순사했다’는 주장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를 비롯한 역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오직
『달성군지(達成郡誌)』의 기록이 유일하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에는 ‘김낙(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이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고려사』 예종 15년(1120년)에 ‘왕이 팔관회에 참석하여 잡희(雜戱)를 관람하다가 국초의 공신 김낙과 신숭겸의
우상을 보고 왕이 감탄하여 시를 지었다’고 하였다.
이 시가 예종이 지은 ‘도이장가(悼二將歌)’이다.

임을 온전케 하온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
넋이 가셨으되
몸 세우시고 하신 말씀
직분(職分) 맡으려
활 잡는 이 마음 새로워지기를
좋다, 두 공신이여
오래 오래 곧은 자최는 나타내신져

신라와 고려시대에 공산(公山)으로 불렸지 팔공산으로 불렸던 기록이 전무하고, 조선시대 사서(史書)에서 ‘팔장군 순사설’은 찾아 볼 수
없는 만큼, 『달성군지(達成郡誌)』의 ‘팔장군 순사설’은 논란이 있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