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

본문 내용으로 바로가기 메뉴으로 바로가기
신산영악(神山靈岳)에 서풍이 불더니 산의 호흡, 상제(上帝)의 자리에 닿았네
첫화면으로 이동 > 역사 > 유래 > 중국 팔공산 전래설

중국 팔공산 전래설

팔공산은 신라시대에 부악(父岳)·공산(公山)·중악(中岳)이라 했고, 고려시대에도 공산(公山)으로 불렸다. 팔공산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지은 시에 ‘팔공산(八公山)’ 시구가 가장 오래된 기록이며, 그 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공산(公山),
팔공산(八公山)이라고도 일컫다’고 기록된 1530년 이후부터 팔공산으로 널리 불렸다.

우리나라 지명 가운데 중국의 지명을 차용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팔공산(八公山)’과 ‘오대산(五臺山)’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자웅을 겨룬 공산동수(公山桐藪) 전투에서 대패한 고사와 전진(前秦) 왕 부견(苻堅)이 중국 안휘성
(安徽省) 비수(肥水) 전투에서 동진의 명장(名將) 사석(謝石)에게 대패한 고사가 비슷하다 하여 ‘공산(公山)’을 중국의 ‘팔공산(八公山)’의
이름을 따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불렀던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중국의 팔공산은 전진(前秦) 왕 부견(苻堅·338~385)과 동진(東晉)의 장수 사석(謝石)과 사현(謝玄)이 대전을 펼친 안휘성(安徽省) 비수
(淝水)의 동쪽에 있는 산이다. 부견은 전진의 제3대 왕으로 370년 전연(前燕)을 공격하여 낙양(洛陽)에서 승리하고, 업(鄴)을 공략하여
연왕(燕王)을 잡아 선비족(鮮卑族) 4만 호와 함께 장안으로 이주시켰다.

이후 전량(前涼)과 대(代)나라 등을 공격하여 정복한 뒤에 주변의 이웃 나라를 차례로 공략하여 북방 대부분을 통일하고 동진(東晉)의
익주(益州)까지 장악하였다. 강남(江南)을 정복하고자, 383년에 90만 대군을 이끌고 동진을 공략했으나 명장(名將) 사석(謝石) 등의 선전
(善戰)으로 비수전투에서 대패하였다.

크게 패한 부견이 떨리는 마음으로 비수의 동쪽에 있는 팔공산을 바라보니 산 위의 초목들이 모두 진나라 군사들로 보여 겁을 먹었다고
전한다.